사랑이 넘치는 능력있는 효자.
"아빠, 살 많이 빠졌네? 요즘 허리 덜 아프지 않아?"
묘제가 있는 날, 이른 아침부터 부모님을 모시고 산으로 향한다. 아버지의 얼굴과 배가 많이 갸름해졌다. 바깥 음식보다 집밥을 먹기 시작하며 나타난 긍정적인 신호다. 한동안 외식에 푹 빠졌던 아버지에게서 매일 아침마다 전화가 걸려왔었다. 국수, 국밥, 도가니 등. 몇 년간 여러 음식점들을 전전하다 요즘 어머니 음식에 다시 맛을 들이며 집밥 삼매경 중이다.
"요즘 아프다는 이야기는 안 하던데."
아무런 대답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답변한다. 그 덕분일까, 평소라면 조수석에 앉아 식사를 할 때만 잠시 밖을 나서던 아버지가 도착과 동시에 차 밖으로 나선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아버지의 발걸음이 꽤 가볍다. 몸이 가벼워지며 허리에 가해지는 부담이 많이 줄어든 모양이다.
명절 때 보았던 모습보다 나아진 아버지의 모습에 친척들이 덕담을 건넨다. 따스한 햇빛 아래,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눈다. 아버지에게 여러 차례 찾아온 뇌졸중은 인지장애와 언어장애를 남겼다. 당신도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친척들과 긴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데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다. 예전처럼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늘어놓는 친척들의 이야기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쳐 주면서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제부가 조카를 데리고 뒤늦게 산을 올라왔다. 조카는 낯선 어른들을 마주하며 겁을 먹은 듯 품 속으로 파고든다. 그러다 자기를 향한 호의적인 반응들에 금세 웃으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가장 익숙한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외삼촌을 졸졸 따라다니다 몇 번 넘어지다 보니 금세 흰 바지가 흙투성이가 되어버린다.
"삼쫀! 삼쫀 차! 뜨럭!"
자동차를 좋아하는 조카는 외삼촌 차를 보더니 눈을 반짝인다. 하지만 막상 차에 태워주니, 너무 높아 무서운 듯 금세 내려달라며 품으로 안겨온다. 무섭지만 신기한 듯, 계속 그 주위를 맴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쫓아가다 또 꽈당 넘어지고 만다. 고르지 않은 흙 위라 걷는 것이 힘들지만, 그래도 폭신해 다치지 않는 것은 또 다행이다.
"하부지. 하부지. 할부지!"
혀 짧은 발음이 간간이 성공적인 발음을 만들어낸다. 할아버지 뒤를 쫓는 조카는 할아버지의 걸음이 신기하다. 늘 집에서는 누워있거나, 혹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만을 봤었는데. 할아버지의 가벼운 발걸음을 쫓아가느라 짧은 다리가 바쁘다. 할아버지에게 안아달라 두 팔을 벌리지만, 아직 조카를 안아 들고 서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라 아버지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조카의 할아버지 사랑이 쉬이 저물지 않는다. 할아버지 옆에 나란히 앉아 있기도 하고, 할아버지 무릎 위로 올라타기도 하고, 잔뜩 애교 섞인 목소리로 '하부지'를 외친다. 함께 걷고 싶어 할아버지 손을 쭉 잡아당기며 어리광을 부린다. 주변에서는 손주의 '하부지 사랑'에 부러움 섞인 말들을 건넨다. 그 사랑에 푹 빠진 아버지는 내 차에 올라탔다가도 다시 제부의 차로 옮겨간다. 이제 슬슬 힘들다며 빨리 집에 가자 재촉을 할 시간인데, 오늘만은 방긋 웃는 손주 곁을 지키고 싶은 날이 되었다.
제부의 차를 타고 드라이브까지 다녀왔다는 부모님은 꽤 늦게 집으로 들어선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표정이 밝다. 조카의 모습을 이야기하며, 입가에 걸린 미소가 작은 주름처럼 박힌다.
"아빠, 걷는 연습 해야겠다. 손주 손 잡고 놀러 다녀야겠네."
평소엔 대답도 안 하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걷고 싶던 손자만큼이나, 손자 손을 잡고 걷고 싶은 할아버지의 마음도 커진다. 역시 네가 효자다. 이모도 삼촌도 성공 못 한 '할아버지의 운동'을 사랑 하나로 성공시킨, 능력 있는 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