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허무함을 주었어
경기도 도농복합지역, 더 정확하게 그린벨트에 살다 보니 산과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진짜 말 그대로 그린그린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그린그린은 비단 풍경으로 머물러있지 않고 내 삶에 훅 들어오기도 한다.
지금은 바야흐로 고구마의 계절이다. 여기저기서 고구마 캐기가 한창이다. 뒷집 할머니네 고구마 캐는 날도 다가오고 있다. 할머니는 아들딸 며느리 모두 불러들여 고구마를 캐라고 시키고 트렁크에 한 박스씩 실어주고 뿌듯함을 느끼실 예정이다. 그리고 고구마 밭 경계에 사는 우리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진다. 바로 고구마 줄기. 지금같이 고구마 비쌀 때 고구마를 줄 수는 없고 고구마 줄기는 마음껏 따가라고 하셨다. 평소 같으면 바로 달려갔을 것이다. 고구마 줄기를 좋아하고 까는 것도 좋아하는 나이기에. 근데 이번엔 좀 망설였다. 고구마 줄기 까는덴 적당한 길이의 손톱과 충분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며칠 전에 손톱을 바짝 깎아버린데다 에너지도 달랑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성의(성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 소쿠리를 들고 할머니 밭으로 갔다.
따오면 바로 까야한다. 신선해야 그나마 잘 까진다. 까는 일이 고되긴 하지만 고구마 줄기가 한 번에 쭉 까질 때 쾌감이 있다. 그렇게 쭉쭉 잘 까지면 얼마나 재미있겠나. 우리 인생이 그렇듯 고구마 줄기도 그렇게 잘 까지지 않는다. 아주 애를 먹이는 것들이 있다. 내 경험상 연두색보다 보라색 줄기들이 그렇다. 이번엔 도저히 안 되겠어서 소금물에 절여서 겨우 다 깠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손이 쭈글이가 될 정도로 고구마 줄기를 다 깠건만 끝이 아니다. 끓는 물에 데쳐서 다시 볶아야 한다. 한아름에서 시작했는데 에계, 겨우 요맨큼으로 끝난다. 고구마 줄기 요리는 허무함의 허탈함의 끝판왕이다. 와! 겨우 이거 먹으려고 생고생을 했나. 품값을 따지면 소고기보다 비싼 음식이다. 올핸 다신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을 해도 소용없다. 맛있어서 힘든 건 다 까먹는다. 그리고 까맣게 물들고 거칠게 갈라진 손을 보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기분이 좋다. 헤나나 타투처럼 아무리 씻고 머리 박박 감아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더 마음에 든다. 이렇게 흐뭇하게 바라보다 손이 깨끗해질 무렵 틀림없이 또 밭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때까지 고구마 줄기가 남아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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