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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17. 2020

타협

시공계약서

착공 도면이 도착했다. 뭐가 이렇게 두꺼워? 하고 들춰 보니, 각종 도면뿐만 아니라 인허가서부터, 건축허가 조건 및 준수사항, 각종 안내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착공허가만 떨어지면 바로 공사에 들어간다. 그전에 건축공사비 견적에 합의하여 시공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의 입장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각자 중요한 것이 달라서 타협이 쉽지 않았다. 시공 소장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생각하는 품질 기준을 포기할 수 없었고, 우리는 우리가 최대로 잡은 예산을 넘고 싶지 않았다.


공법을 바꾸자!


시공 소장이 먼저 경량 목구조로 바꾸면 어떠냐고 말을 꺼냈다. 처음엔 철근 콘크리트와 경량 목구조의 장단점을 잘 몰라서 선뜻 그러자고, 동의할 수가 없었다. 검색해보면서 경량 목구조의 장점을 알게 되었다.(경량 목구조가 다소 경제적이면서 공사기간이 짧고, 친환경적이고, 단열이 뛰어나고, 디자인 적용에 유연하다 등등) 아는 만큼 좋아진다고 공부하면 할수록 경량 목구조가 좋아지고 있었다. 우리가 결심하고 나니 이번엔 먼저 말을 꺼냈던 시공 소장이 난색을 표했다. 세 집이 같은 소재로 할 때 비용상, 관리상 이점이 많다면서 세 집의 공법을 통일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웠지만, 이제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면적을 줄이자!


공법을 바꿀 수 없다면, 면적을 줄이자고 했다. 사실 애초 바닥면적 15평으로 연면적 30평만 지으려던 생각이었는데 설계를 하다 보니 40평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우리는 다시 면적을 줄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큰 집에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착공 도면이 나온 상태에서 면적을 줄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설계도면을 수정하게 되면 설계비용이 추가 발생하고, 집의 균형도 깨질 판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면적을 줄인다고 그에 정비례하여 견적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예를 들어 건축비가 평당 600만 원이라고 했을 때, 3평 줄인다고 1,800만 원이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창호를 바꾸자!


그다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창호의 다운 그레이드밖에 없었다. 주택은 단열이 중요하지만 우리는 추위를 잘 타지 않는 사람들이라 외풍이 좀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사실 아파트처럼 단열과 난방이 잘 되면 오히려 문제였다. 더운 걸 못 참는 우리 딸은 가출할 수도 있다고 농담도 했다.


하지만 좋은 집을 지어주고 싶은 시공 소장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이왕 짓는 집, 좋은 자재로 잘 지어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는 게 그의 오랜 신념이고 경험칙이었다. 그런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예산도 거의 갈 데까지 가 있는 상황이었다. 어느 한쪽이 양보해야 끝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몇 시간째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공회전하고 있었다. 서로 인내심이 바닥난 탓일까?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강한 어휘들이 튀어나왔고, 나는 그만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떤 말들은 내 감정을 심하게 건드렸다. 바람이 찼다. 마음이 시렸다. 미움인지 설움인지 모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좀 서운하긴 했어도 시공 소장을 탓하고 싶지 않다. 어찌 보면 상대방의 말에 화가 난 것 같지만, 나 스스로 꾹꾹 눌러 놓았던 긴장과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애초에 하지 말걸 그랬어, 후회하는 마음, 그렇게 싫다는데 왜 하자고 그랬어, 원망하는 마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내 인내심은 고작 돈 앞에서 바닥났고, 지금이라도 다 포기하고 싶은데, 퇴로가 없다는 것이 더 슬펐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남편도 마음이 많이 상했다. 남편이 중단하자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없었다. 되돌아 가는 게 더 두려웠다.


당사자끼리 해결이 안 되니 설계를 하신 정 소장님께 중재를 요청했다. 부부 싸움해서 속상한데 친정아버지가 전화했을 때 마음이 이럴까?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르는 물들이 주르륵 흘렀다. 정 소장님은 상한 마음을 달래주면서 몇 가지 제안을 하셨다. 우선 각론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했다. 나는 예산을 줄이기 위해 예산 항목 하나하나를 따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작은 것에 함몰되어 큰 방향을 잃게 된다며 큰 틀에서 합의하고 세부적인 것은 시공 소장에게 일임하라고 하셨다. 그러겠다고 했다. 우리를 잘 아는 시공 소장이 더 좋게 해 주면 해줬지, 나쁘게 해 주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서로 약간씩 양보하는 예산을 제시하셨다. 나는 가구와 인테리어 비용으로 생각해두었던 예산을 포기했다. 가구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어렵게 어렵게 중재안을 수용했다. 시공 소장이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나도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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