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들보다 잘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길을 걸을 때, 주변 사람들의 동선과 도로의 상황을 고려해서 미리 요리조리 피하는 것이다. 혼자 걸어가고 있는데 맞은 편에 여러 사람이 오거나, 붐비는 길에서 사람들을 피해 빨리 걸어가야 하거나, 사람들과 여럿이 걸어가고 있는데 길이 좁아 모두 나란히 걸어갈 수 없을 때, 나는 도로의 너비,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걸음 속도, 그들이 가고 있는 방향을 모두 고려하여, 최대한 부딪히지 않게끔 피하기도 하고 빨리 앞질러가기도 하고 속도를 줄이기도, 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여러 사람과 걸어가고 있을 때 맞은 편에 사람이 올 때는 누구보다 먼저 무리 앞으로 가거나 뒤로 물러나서, 상대방이 지나갈 수 있게 공간을 만든다.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빨리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그 사람이 나에게 가까이 오기 전부터 옆으로 비켜선다. 모두 그렇게 하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눈 옆을 가린 말처럼, 도로 위에 혼자 있는 것처럼, 자신의 갈 길만 불도저처럼 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가끔 잘 걸어가다가 길 한 가운데 갑자기 멈춰 서는 사람때문에 내 동선이 꼬이거나, 상대방의 동선을 고려해서 비켜가고 있는데 오히려 내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오는 사람을 만날 때는 생각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걸어가고 있는 걸까. 별 일이 아닌데도, 왜 그 작은 배려마저도 하지 못하는 걸까, 하며 혼자 괜히 분노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남들도 모두 나와 비슷하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했다. 길을 걸어가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인 일에서도 내가 주변 상황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듯이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고. 내가 상대방이 걸어가는 방향, 속도를 고려해서 피해가는 것처럼, 남들도 그럴 거라고. 그러나 항상은 아니지만, 꽤 자주, 그렇게 피해가는 사람이 나 혼자일 때가 있다.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신경쓰는 이런 성격은, 내가 사람들과 만날 때도 그대로 드러난다. 회사에 있을 때도, 여러 친구들과 있을 때도, 예전에 학교를 다닐 때도, 나는 나와 같이 있는 모든 사람의 상황과 감정에 주의를 기울였다. 누가 기분이 좋은지, 누가 지금 불쾌해 하는지, 누가 지금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고, 누가 지금 소외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내 에너지를 무의식적으로 썼다. 지금도 그렇다.
아주 사소한 일로는, 회사에서 간식을 먹거나 회의를 하려고 테이블에 둘러앉으려고 할 때, 의자가 몇 개니까 자리가 몇 개 부족하고, 그러니 나는 남들에게 먼저 자리를 양보하고 의자를 가져와야겠다고 그 짧은 몇 초동안 생각한다. 친구들 여럿이서 만날 때, 어떤 한 친구의 얘기가 조금 지루해서 다들 관심이 없어 보인다면, 친구가 기분이 상할까봐 나라도 그 친구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면서 들어주려고 한다. 다같이 걸어갈 때 길이 좁아 한 사람이 혼자 뒤쳐질 때면 일부러 뒤로 가서 친구 옆에 서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배려가 없고 나는 착하다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성격은 이렇게 피곤하게 생겨 먹었다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든 어느 무리에 있든,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의 성향이 어떤지, 누가 분위기를 주도하고 누가 조금 겉돌고 소외되고 있는지를 빠르게 파악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이 끝나기 전에는 내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내 온전한 내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까지 시간이 남들보다 조금 오래 걸리는 편이다. 아마 이런 성격은 학창시절에 아무 생각없이 내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되거나 오해를 사는 경험을 하고, 상처를 받고, 그래서 진짜 나를 숨기고, 상대방의 성향에 나를 맞추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집단 안에서 소외되고 작아지고 위축되는 그 마음을 알기에, 이제는 나름의 방어막을 형성하게 된, 그래도 겉으로나마 "어른"이 된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래서 그렇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가 충전되기 보다는 에너지가 소진되는 타입이다. 약속은 평일에는 최대 하루, 주말에도 이틀 연속은 안 되고 되도록 토요일. 평일은 회사에서 사람들과 하루종일 붙어 있다가 또 사람을 만나려면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주말은 토요일과 월요일 사람을 만나는 날 사이의 일요일은 하루 쉬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달로 치면 약속은 격주로 잡아야 한다. 평일에 약속이 있는 주가 연속으로 있으면 정말 번아웃이 온다.
이런 일화도 있다. 사람들이 나에게 결혼해서 좋은 점이 뭐냐고 물어보면 나는 보통 이렇게 대답한다. "약속을 잡고 만나지 않아도, 그냥 집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것이 좋다"고. 그럼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남자친구를 약속을 잡고 만나?". 나는 지금 남편이 된 사람과 연애를 할 때도, 평일에 한 번─심지어 평일 중에서도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약속을 잡는다─, 주말에는 토요일 규칙을 칼같이 지켰다. 친구들 중 이런 내 모습에 서운해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너무 자기만 생각한다고 얘기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정해놓은 기준선 안에서만 행동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에게는 이런 생활 패턴이, 친구들과의 만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하려는 나만의 룰이었지만 말이다.
학교다닐 때에는 지금처럼 자유롭지가 않았다. 정해진 시간동안, 그것도 많은 사람과 항상 붙어 있어야 했으며, 모든 걸 같이 해야 했다. 혼자 하고 싶어도, 정말로 혼자 있으면 이상하게 보이고 괴짜가 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에너지를 충전시킬 시간도 없었다. 매 순간 얘기해야 했고, 그 말인즉슨 얘기해야 할 상대방이 있었고, 상대방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학교다닐 때 나쁜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가끔 다같이 한 공간에서 지지고 볶았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올시다.
나는 지금이 좋다. 혼자 출근하고 혼자 퇴근하고, 회사에서도 업무 얘기 외에는 내가 대화의 타이밍을 결정할 수 있고, 밥도 혼자 먹을 수 있다. 내가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을 고려하면서 적절히 분배할 수 있다. 또, 이런 나의 모습을 존중하지 않고 내가 나를 싫어하게끔 만드는 사람과 무조건 부대끼지 않아도 된다. 나의 이런 신중한 성격, 예민한 기질, 관계를 형성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점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만을 만날 수 있다. 나를 작아지게 하고 나를 위축시키는 사람들은 내가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직장인인 지금도 괴짜라고 불릴 수 있는 리스크는 감수해야 한다. 회사를 학교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기 때문이다.
30대로 접어든 지금, 이제서야 나를 알 것 같다고 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오랫동안 나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왜 항상 사람을 만나고 얘기하면 집에 가고 싶을까 생각했다. 마구떠들고 나서도 헤어지고 나면 "이제 좀 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왜 먼저 들까 생각했다.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일이 나에게는 왜 이리 버겁고 힘들까 생각했다. 나를 많이 싫어했고, 나를 바꾸려고 했고, 힘들어했다. 그러나 이제서야 나를 인정하고 나를 보듬어줄 수 있게 됐다. 구구절절하게 써놓은 이유들을 깨닫는 데 30년이 걸렸다. 반짝반짝하고 통통 튀던 학생 때 조금 더 나를 받아들여줬더라면 더 알차게 그 시간을 누릴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 그런 경험이 내 안에 쌓여, 다른 사람의 기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더 배려할 수 있게 된 것이리라.
오늘도 나는 집에서 충전을 한다. 콘센트에 코드를 꼽는 것처럼,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처럼, 내 안에 에너지를 채운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그 에너지를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데 쓴다. 물리적인 공간을 이리저리 살피고, 보이지 않는 공간도 이리저리 살피느라, 그 에너지를 쓴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얼른 집에 가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