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기준을 대성당에 둔 자
<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송태욱, 문학동네, 2017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스가 아쓰코, 송태욱, 문학동네, 2017
<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송태욱, 문학동네, 2017
<먼 아침의 책들> 스가 아쓰코, 송태욱, 문학동네, 2019
스가 아쓰코는 1929년 생이다.
10살이 되기도 전에 조국 일본은 전쟁 중이었다.
24세 되던 1953년에 유학을 시작하여, 줄곧 유럽에 머물렀다.
밀라노의 코르시아 서점을 거점으로, 일본 문학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결혼 6년 만에 이탈리아인 남편과 사별했다.
1971년 귀국하여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했다.
69세 되던 1998년에 사망했다.
61세에 첫 에세이를 내고 69세 사망 직전까지 총 8권의 책을 냈다.
어린 시절부터 켜켜이 쌓아두었던 문장들이
환갑이 되자 마침내 보를 뚫고 쏟아져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첫 에세이부터 그녀의 문체는 안정되어 있다.
오랫동안 번역을 해와서이기 때문이겠지만,
줄곧 읽고 사색하고 쓰는 것이 생활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가 유학 시절 책에서 발견하여 마음 깊이 새긴 글이 있다.
“스스로 대성당을 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성된 대성당에서 편하게 자신의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생텍쥐페리
그녀는 삶의 기준을 대성당에 둔 자이다.
자신이 지금도 대성당을 세우고 있는가, 아니면 잠깐 안에 앉아 있는가, 아니 좀 더 심할지도 모른다. 앉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자리가 비지 않을까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파리, 샤르트르, 랑스 등으로 처음에는 고딕, 그러고 나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을 찾아다닌 유학생 시절, 기증자의 이름을 새긴 작은 구리 표찰이 붙은 성당 안의 의자를 볼 때마다, 또한 망설이며 걷기 시작한 길이 갑자기 벽에 부딪혀 앞이 보이지 않게 될 때마다 나는 생텍쥐페리를 떠올리며 이 문장을 나침반 삼아 내가 지금 서 있는 지점을 확인했다. -<먼 아침의 책들> 147쪽.
알겠다. 나 자신을 그녀에 비춰보니 나를 제대로 알겠다.
타인이 지은 대성당 안에 들어앉아 있는 삶.
그나마 자리를 빼앗길까 봐 늘 두리번거리는 삶.
그것이 나의 삶이었다. 안정과 안락을 추구했다. 불안과 변화를 두려워했다.
따라서 지금의 무료와 권태는 다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었고, 나는 할 수 없었던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내게는 단지 용기만 없었던 것이 아니다.
동기도 없었고 절실함도 없었다.
물론 유학을 떠날 만한 제반 인프라도 없었다.
그저 막연한 꿈, 낭만적인 도시에서 금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꿈 정도에 머물렀다.
나는 부끄럽게도 초등 4학년 이후로 테리우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성관을 가진 80년대 키드였다.
그녀에게 유학은 현실이었다.
유럽을 동경해서가 아니라 일본을 떠나고 싶어서였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일본의 위압적인 정치 체제와
학창 시절 내내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제국주의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남편 페피노는 이탈리아 진보 가톨릭 운동을 하던 사람이다.
코르시아 서점을 진지로 하고 반파시즘, 반제국주의 활동을 하던 사람이고, 그녀 또한 그 내부자였다.
그녀는 코르시아 서점 시절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지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지니고 살아야 하는 고독과 이웃하고 있으며, 각자 자신의 고독을 확립해야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나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젊은 날 마음속에 그린 코르시아 서점을 잃어감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고독이 한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황야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230쪽.
그녀가 일본에서 지구 반 바퀴를 날아 도달한 곳, 파리. 그리고 이탈리아.
그녀가 이렇게 먼 곳으로, 될 수 있으면 일본으로부터 멀리 가고 싶어 했던, 또 갈 수 있게 했던 데에는 아버지가 있다.
그 아버지는 조국 일본과 무척 닮았다.
대를 이은 사업가이자 재력가였고,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었다.
유럽, 특히 영국을 무척이나 동경하는 사람이었다.
1930년대에 1년에 걸쳐 세계일주 여행을 한 사람이고 딸에게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꼭 타보라고 늘 얘기했던 사람이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를 동경했으나 그로부터 멀어지고 싶었고,
동시에 그 아버지의 지지와 지원에 힘입어 유럽행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음을 안 것은 스무 살 때였다..... 투명한 가을 햇살 속에 옷자락을 시원하게 휘날리며, 아버지는 어떤 여자와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휴일에 우리와 외출할 때처럼 희색 버선을 신은 발 언저리가 눈부셨다. <베네치아의 종소리> 24-25쪽
나이 스물에 본 장면을 60 넘어까지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여 묘사하고 있다.
유럽으로 떠난 그녀는 조국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아마 남편이 죽지 않았다면 여태 밀라노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석 달쯤 지났을까, 페피노가 죽었다. 한 달 전부터 늑막염으로 몸져누워 있었다. 병명을 안 뒤로 나는 밤낮없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는 듯한 그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베네치아의 종소리> 277쪽
남편이 죽고 얼마 후 그녀는 결국 일본으로 돌아왔다.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면서 번역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다 61세에 처음으로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보냈다.
그녀의 첫 책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밀라노, 나폴리, 베네치아, 트리에스테 등 아름다운 이탈리아 도시와 그곳에 얽힌 추억들로 차 있다. 2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까지 인생에서 가장 왕성한 시기를 보낸 곳이기에 아마 제일 먼저 세상에 내놓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2006년 2월에 나폴리를 갔었고, 2018년 8월에 트리에스테에 갔었다.
길에 쓰레기가 나뒹굴고 병 깨지는 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았던 나폴리였다.
아름다운 아드리아해를 앞에 둔. 작지만 품위 있는 도시 트리에스테였다.
그녀는
‘베네치아라는 섬 전체가 꾸준히 성행 중인 하나의 거대한 연극 공간’(<밀라노, 안개의 풍경> 205쪽)
라고 정의했다.
2010년 갔던 베네치아도 그랬다. 온통 가면 투성이에 각종 트릭이 만연했다.
우리는 중국 떼 관광객의 술수에 밀려 하마터면 배를 못 타고 밀려날 뻔도 했다.
아들 둘과 함께 했던 유럽 21일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던
밀라노 대성당 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거리 끝에 있었을, 지금은 사라진 코르시아 서점.
여행은 이래서 다시금 그 가치를 드러낸다.
내 삶 속에 녹아 있었다.
그녀의 이탈리아와 나의 이탈리아,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이탈리아를 떠올리는 일은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중에서도 꽤 큰 재미다.
글이 아름다우면 그 글의 원어도 아름다워 보이나 보다.
일본어를 배워서 원서로 읽고 싶다.
일본어로 표현된 그녀의 문장을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