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격리시절 4
어제와 오늘, 옛 직장의 동료 두 분이 안부 전화를 주셨다. 어제 전화하신 박 선생님은 모 학교의 도서관 운영을 총괄하시던 분이었고, 오늘 전화해 준 언니는 첫 직장이었던 곳에서 만난 선배이다. 나는 그곳에서 몇 년 일하지도 않고 퇴직했지만 꾸준히 연락이 되어 온 선배였다.
박 선생님이 갑자기 전화를 하신 이유는 이랬다.
서울에 있는 미술관에서 일하는 선생님의 딸 지원이가 미술관이 휴관하면서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내려 와 있단다. 낮잠을 자다가 꿈에 내가 나왔다며 안부가 궁금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지원이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지만 그것도 지원이가 고등학생 때였고 대학에 진학한 이후 몇 년간 보지는 못했었다. 지원이는 나와 직접 통화를 하고 싶다며 엄마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선생님 다 잘 될 거에요. 제 꿈에 나온 사람들은 꼭 좋은 일이 생겨요."
꿈에 내가 나왔다는 이야기에 통화를 해 보고 싶었다는 말도 그랬지만, 이십대 중반인 지원이가 내게 해 준 말이 고마웠다. 어린 동생이 한 말이라고는 믿기 어렵게 따뜻한 울림이 있는 위로였다.
사실 그 전날, 계약직 연구원을 뽑는 자리에 지원했다가 탈락했다. 최종 결과를 메일로 확인하고 따로 누구에게 말했던 것은 아니라서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겠지' 하며 위로하고 지나가려던 참이었다.
며칠 전 박 선생님과 연락하면서 거리두기 2단계 이상이 진행중이니 이 상황이 좀 나아지면 보자고 하고 끊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전화를 하셔서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내 꿈을 꿔 준 지원이 덕분에 두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근 2주 사이에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 계단을 이용한 것 외에는 거의 격리 수준으로 집에 머물러 있다. 몸은 커녕 머리도 쓰지 않고 앉아서 텔레비전만 종일 본 것 같았는데, 박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나니, 내가 뭘 하고 있나 싶어졌다.
움직여야겠다. 계속 실패만 하고 있지만 그러더라도 또 도전하는 것이지 뭐. 새해 첫 날의 계획이 그렇고 다이어트의 시도가 그렇듯이 말이다.
사실 벌써 올해만 서너 번 탈락을 경험했다. 1월부터 3개월 넘게 준비해 지원한 프로젝트에서 탈락했을 때에는 아쉬움이 컸다. 나중에 보니 내 계획서가 검증이 덜 되었던 것 같다. 합격한 사람의 계획서를 보니 한눈에 나보다 더 출중한 실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당한 일을 하면 될 텐데 내가 혹시 너무 거창한 일을 해 보겠다고 하는 것인가, 내 수준과 능력에 맞지 않는 일을 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모르긴 해도 몇 년의 공백이 있었던 것도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포기해야 하겠다 싶은 마음도 들었다. 아니, 마음으로는 이미 수년전에 포기했던 것이나 나름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떤 분이, 학교에 계약직 연구원 자리가 있다며 지원해 보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주신 것이 괜한 계기가 된 것 같다. 고민 끝에 그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자리에 이력서를 냈지만, 탈락했다.
어차피 이력서 등을 쓴 김에 비슷한 연구직 구인 공고가 있어서 그 다음주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채용 절차가 진행되는 중이었고 최종 결과를 어제 메일로 받은 것이었다. 연달아 세 번(어떤 이들은 그정도의 서류 탈락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수백개의 이력서를 쓴다는 사람도 보긴 했으니까)이나 비슷한 직렬에서 탈락하고 있으니, 이제 눈을 낮추던지 분야를 바꾸던지 해야하나 싶은 차였다. 그런 때에 박 선생님과 지원이, 그리고 직장 선배였던 강 선생님이 안부를 물으며 힘을 준다.
박 선생님과 통화를 끊고 난 후 "포기할 수 없게 하시네요." 했더니, 절대 그러면 안 된단다. 자신을 더 사랑해 주어야 한다고.
강 선생님과는 조금 전에 통화를 하고 끊었는데 안부차 전화주신 것이었다. 배려가 감사했다. 나는 오히려 먼저 전화를 드리는 편이 아닌데, 참. 이 분들의 이런 성의를 내가 그동안 당연한 듯 받고 있었던 건 아닌가 반성한다.
너무 아웃사이더로 있는 것도 꼭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 격려해 주고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도 어떤 때에는 다 귀찮아질 때도 있는데, 오늘은 이런 분들이 있어서 포기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핑계도 참 좋다. 기회를 더 찾아보아야 할 이유,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고 고백하는 편이 더 솔직하겠지?
몇몇 지인들의 배려와 격려를 생각해 보니 마치 십시일반의 기적을 본 것만 같다.
예쁘고 작은 살림거리를 나누어 준 강 선생님, 필요한 만큼의 그릇 세트를 챙겨주었고, 늘 성의있게 한마디 한마디 대화해 주는 재경언니, 책 출간 소식을 듣고 직원들과 홍보해 주시며 힘을 준 진희 언니, 박 선생님과 딸 지원, 거리 두기 행정명령이 발동되어 있는 시기에 어느 날 중고서적을 한 아름 보내 준 창욱 선생님이 고맙다. 태풍에 피해가 없었는지 문자를 남겨주신, 작년에 개인적으로 알게 된 학생 서연의 부모님도.
그리고 오늘은 출장 차 시청에 들르게 되었다며 연락주신 첫 직장에서의 상사, 담시님이 고맙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만나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생활이 아니라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여럿이다. 거창할 것 없이, 다 '사람' 덕분이다. 살아는 있는지 물어봐 주는 안부들. 몇 년전에 떠나 온 직장에서도, 1년을 떠나 있었던 이 땅에서도 아직 안부를 물어봐 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내가 돌아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