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딸기를 찾아서

[계절의 오행](2023) #1

by 정연진

그날 우리는 한밤중에 식물도감을 뒤졌다.

밤 10시가 다 된 시각,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 일을 마치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느라 전화기를 못 볼 뻔했는데 다행히 끊기기 전에 받은 것 같다. 이미 주무실 시간인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거칠게 책장 넘기는 스윽스윽 소리가 들린다. 스피커를 켜 둔 모양이다. 책을 넘기는 소리 끝에 조카의 목소리가 걸렸다. 다짜고짜 용건부터 들이민다.

“뱀딸기가 없어.”

조카의 목소리는 진지하고, 순간 나는 “엄마 왜?” 하려던 목소리 톤을 "꿀바른" 따뜻한 톤으로 바꾼다. 성대에 압박을 주면서 가식적으로 “솔”음으로 응대한다.

“아, 뱀딸기가 안 보여? 딸기 먼저 찾아볼까?”

딸기를 우선 찾겠다고 재빨리 대답한 아이는 다시 수화기 너머로 사라져 버리고 가방을 챙기다 만 나는 엉거주춤 전화기를 들고 서 있는 참이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여러번들린다. 그러다가 경쾌하게 딸기를 찾았다는 외침이 있더니 다시 조금 후에 “뱀딸기 찾았어!” 한다. 거의 혼잣말이다. 잠시 후 전화는 끊겼다. 이런.


아니, 지금 이 시간에 누구와 있길래 주무실 것이 뻔한 할머니 전화기를 들고 나한테 전화를 한 것인지… 뻔한 어른들의 질문들에 익숙해진 것인지 질문을 하려는 찰나 눈치빠르게 전화가 끊겼다. 걱정되는 마음은 그냥 안고 우선 퇴근을 했다.


다섯 살인 조카는 요즘 식물도감을 본다. 그림이 수채화처럼 그려져 있고 책 한쪽면을 그림이 차지하고 있어서 식물의 생김새를 꽤 자세히 볼 수 있는 책인데 그래도 아주 어린아이들용은 아닌 듯하다. 그 책이 뭐가 그리 좋은지 하루에 열두 번씩은 이런저런 식물들을 찾는다며 책을 앞뒤로 한참이나 넘겨대는 것을 보았다. 자기가 제일 좋아한다는 딸기 그림을 찾은 다음부터는 계속 딸기 찾기 미션을 반복한다. 책은 항상 거실 바닥에 이리저리 뒹굴뒹굴하는데, 다른 놀잇감이 있을 때는 뒷전이다가 가끔 눈에 띄면 지나가다가 딸기 찾고, 넘기다가 좋아하는 과일 그림이 나오면 보여주고, 또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다가 괜히 심심하면 또 딸기를 찾는다.


그러던 어느 날, 차분히 책을 넘기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카는 꽤 진지하게 한참이나 식물도감을 앞부분부터 넘겨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깔깔거리고 웃는다.

“이거 봐, 뱀딸기래, 뱀딸기!”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식물이 존재한다는 게 신기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딸기를 흉내 낸 아류를 비웃은 것인지, 아마 이름이 그냥 장난 같다고 생각했는지 소탕하게 웃어대는 모습이 어른스럽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아직은 그런 대화를 나누기는 좀 무리라서 조카 가까이에 가서 나도 책을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뱀딸기를 발견한 날 이후, 딸기와 뱀딸기 그림이 있는 부분을 차례로 찾고는 뱀딸기 그림을 향해 깔깔거리고 웃으며 논다. 조카에게 뱀딸기는 감히 딸기의 이름과 모양을 흉내 낸, 겁 없고 이상한 식물일 뿐이리라.


다음 날 쯤인가 상황을 전해 들으니, 아빠 엄마가 다른 날보다 퇴근이 늦어서 조카는 할머니와 늦은 시간까지 있게 되었단다. 초저녁에 잠드는 할머니 곁에서 밤늦게 잠이 드는 편인 다섯 살 손녀는 혼자 앉아 있다가 그 책을 집어 들었을 터였다. 왼손으로 과자를 집어 먹으며 오른손으로는 장난질할 무언가를 찾았을 것이다. 할머니를 깨울 수는 없고 뭐든 하면서 남은 시간을 혼자서 버텨야 하니까 말이다. 할머니는 스르르 잠이 들고, 놀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의 허전함과 약간의 무서움을 달래준 책 한 권, 그리고 그 안의 딸기와 뱀딸기를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동요 <섬집아기>의 그 그림이 그 날 조카의 모습에서 그려졌다.


엄마는 나와 조카가 뱀딸기 그림을 가리키며 낄낄대고 있으면 고개를 절래 흔들며 지나가신다. 철없는 둘이서 웃기고 있네 하는 표정이시다.


나는 사실 식물도감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조카가 아니었다면 식물들의 세밀화를 살펴 보는 경험을 못해 보았을 것이다. 흔한 들풀에도 이름이 다 있다는 것을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조카가 어른들에게 혼이 나며 나름 신경써서 만들어준 흔한 믹스커피와 조카의 식물도감

그날 밤, 전화기 너머로 책장을 넘기던 그 진지한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아가야, 너는 지금 나에게 처음으로 세상의 식물들을 만나게 해 주고 있단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박은빈]이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