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NOV22
11월이 되면 나는 항상 대학 수학능력시험과 첫눈을 생각한다. 한국에서 11월은 학교와 학부모와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결전이 달'이 되어 왔는데 지금이야 수시 원서 접수기간이 수능시험 당일보다 더 중요하고 긴장되는 시간으로 여겨지지만 내가 수능시험을 보았던 그 해에는 수시 못지않게 정시에 대한 부담도 컸었다. 수시 접수로 이미 어느 정도 대학이 결정된 친구들도 있었지만 분위기는 그래도 수능시험도 잘 봐야 한다는 쪽에 더 기울어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수능시험을 봤던 학교는 시험을 위해 처음 방문했던 곳이었다. 그 지역에서 나름 오래된 사립학교였는데 내 학교도 아니고 집에서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없는 위치여서 내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배정은 아니었다. 수능시험을 끝내고 그 학교를 나섰을 때의 풍경과 인상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해는 져서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고 바람은 좀 찼으며, 학교 앞은 수능시험을 마치고 나온 학생들, 학부모들, 차량들로 북새통이었다. 학교가 외진 곳은 아니었지만 학교로 올라가는 길이 좁은 편이어서 내가 걸어서 수능시험장 밖 큰길로 나오는 데에도 한참 걸렸던 기억이 난다.
사정상 가족들이 학교로 마중을 오지도 못했지만 나는 그날 약속도 없었다. 그때 내 친구들은 대부분 수능시험날은 부모님과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하필 나는 친한 친구들과 같은 학교나 같은 교실에 배정도 안되어서 수능시험 당일에는 혼자 학교를 찾아갔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그때 내가 살던 읍지역과 행정구역이 달랐다. 나는 대부분 중학교 친구들이 진학했던 중학교 바로 옆의 고등학교가 아니라 시외지역으로 진학했다. 당연히 상당수의 친구들과 그때부터 연락이 끊겼고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던 일부 친구들과도 어울리기는 했지만, 중학교 시절 친구들만큼 허심탄회하거나 격 없이 지낼 만한 친구들은 없었다. 고등학교에 가서 친해진 친구들은 또 대부분 그 지역 출신들이니 나와는 집으로 향하는 길이 달랐다. 즐거운 시절이었지만, 크느라고 정신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느라 집에 있을 시간도 거의 없었지만, 수능시험 당일에 함께 이동하고 함께 할 가족이나 친구가 없었다는 것은 왜 그런지 어깨가 처지게 우울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시험을 친 학교에서 집으로 가려면 버스를 갈아타야 해서 터벅터벅 걸어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서 느꼈던 허탈함, 외로움, 쓸쓸함, 아쉬움... 그리고 배고픔.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고 푹 쉬었더랬다.
11월은 수능시험일에 대한 나 혼자만의 기억 때문에 늘 초겨울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능시험일 전후에는 항상 아주 추운 날이 하루쯤 있었고 그다음 주쯤은 첫눈이 오는 시기가 아니던가. 나는 보통 11월 23일 전후로 첫눈이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에도 그랬고, 고등학교 1학년 때에도 그랬고... 그리고 몇 년 전에도 그랬고, 첫눈은 내 기억에 언제나 11월 마지막 주였다. 차고 흰 것, 차고 흰 날, 첫눈이 오는 날... 함박눈이 내리는 12월은 차라리 따뜻한 느낌인데 왠지 모르게 첫눈이 내리던 11월은 언제나 바람은 차고, 하늘도 푸르게 차고, 나무도 차고... 마음도 찼다.
2015년의 11월은 너무 바쁘게 보낸 나머지 세상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11월 마지막 주, 낙엽이 모두 저버린 나무들을 내려다보았던 그날 풍경이 또렷하다. 2016년의 11월은 메마른 가지와 메마른 공간들 속에서 오랜 친구와 자주 만났던 시간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는 기간 동안 내가 가장 좋아한 친구와 그 해 몇 달을 자주 만났다. 다음 해에는 자주 볼 수 없게 되어서 짧은 상봉이 되고야 말았지만.
2017년의 11월은 숨 막히는 일정 속에서 그나마 기차를 타고 지방에서 서울로 오갔던 시간들이 위로가 되었다. 그해 11월은 운이 좋으면 새벽 또는 늦은 오후의 가을 풍경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볼 수 있었다. 평일 오후 조금은 한산한 기차 안에서 섬진강이며 곡성이며 온통 단풍으로 가득한 남도의 풍경을 보다 보면, 기차 여행을 하는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다가 곧 전주를 지난 후부터는 수업 준비 자료를 보느라 마음이 바빠졌지만.
2018년 11월은 몇 가지 일들을 해결하고 주변을 정리하던 기간이었던 것 같다. 외할머니의 집에 있으면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의 집에서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어릴 적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종종 뵈러 갔던 집이어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려지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이 집을 비워야 하는 일이 생겨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던 것이 2018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2019년 가을은 여름에서 가을의 경계가 없이 모호하게 지나버린 것 같다. 한국의 가을을 경험하지 못했고 첫눈을 보지 못했다. 2020년 가을은 유례없는 방콕 생활을 해야 했던 시기이다. 모두가 우울감을 경험했을 것이라서 유난을 떨 수는 없지만, 삶이 벼랑 끝에 몰리지는 않을까 고민도 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가을은 나에게 '9월'이 아니라 '11월'의 이미지이다. 9월은 아직 여름이 다 가지 않은 여름 끝이어서 여름의 열정이 남아 있고, 10월은 곡식이 아물고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는, 그래서 진짜 '가을'을 향해 볕이 깊어지고 짙어지는 시간이라는 느낌이 들어서겠지. 9월과 10월을 지나 드디어 11월이 되면, 여름은 가고 겨울이 오는 중간지대인 깊은 가을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단풍과 은행과 낙엽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는 이 시기는 이제 더 이상은 여름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아직 겨울도 아니라는 것을 낙엽들이 온몸을 뒹굴어 알려주는 것만 같다. 11월은 그래서 가장 가을다운 시간인 것 같다. 11월은 내게 또렷한 하나씩의 잔상을 남기고 2015년, 2016년... 한 해 한 해 지나왔다.
이제 2022년의 11월은 어떻게 지나가는가.
고3 시절, 시험장의 기억을 더듬었으니 나는 이제 첫눈을 기다리면 되겠다. 바닥에 뒹굴다가 뒹굴다가 파삭파삭 메말라버린 저 낙엽들처럼, 11월은 건조하고 우울하게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