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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싸움이 주는 영향력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by 쓱쓱

눈만 마주치면 사력을 다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부부를 보며 아이가 말한다.


"그렇게 맨날 서로 싸울 거면 그냥 이혼해."

"뭐 하러 그렇게 계속 싸우면서 살아?"


서로 상처주기 위해 사는 사람들처럼 맹렬하게 서로를 대하는 부모를 아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렇게까지 미워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만 남는 관계를 왜 지속하고 있을까.


그런데 그 이유가 더 기가 막힌다.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면서도 함께 사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 아이들이 느끼는 죄책감과 무기력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싸움이 지속되는 지옥 같은 상황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말은 아이의 존재 자체를 뒤흔든다.

자신 때문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처절하게 고통스럽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게 만든다.


"아아,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

"아아, 나는 왜 태어나서 이들에게 고통이 되고 있나."


이처럼 자존의 근거가 흔들리는 일은 매우 심각한 부작용을 남긴다.

살아가는 내내 관계 안에서 불안에 휩싸이고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매 순간 흔들린다.


뿐만 아니라 부모의 욕설과 폭력성에 그대로 노출된 아이들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도 험악한 분위기에 둔감해진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감정을 차단하고 냉담하고 차가운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감정이 드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진다.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감정인지를.

그러면 당연히 타인에 대해서도 둔감해진다.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읽을 수 없게 되고 타인이 보여주는 반응을 적절히 반영해 주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관계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진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어렵기만 한 관계에 대해 회의가 들고 부정적인 자극을 덜 받는 쪽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굳이 사람을 만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잘 알다시피 인간은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말하는 것도 입이 아플 정도다.)

존재 자체가 관계성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을 타고난 생물학적 경향성이다.


여기까지 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은 강하지만 막상 관계 안으로 들어가면 뭔가 불안정하고 불만족스럽기만 하다.

특히 관계 안에서 상대방으로부터 부정적 자극을 감지하면 자신에 대한 자존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죄책감에 시달린다.


"아아, 역시 나는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야."

"아아, 또 나 때문에 이 사람이 불행하구나."


부모와의 경험에서 내재화한 자동적 기제가 거침없이 발동하게 되면서 결국 단절을 강행한다.

혹은 그렇게 이별의 아픔이 거듭되면 상처가 반복되면서 스스로 두꺼운 갑옷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 결과 독립적인 인간을 초이상화하거나 관계를 맺는 것을 의존적인 나약함으로 절락시키며 스스로에게 과잉보상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시작한다.

외형이 두껍고 강력할수록 내면은 더 약하고 연약한 상태로 남게 된다.


결국 사람에게 다가가면 상처를 주거나 받게 되고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외롭고 우울해진다.


부모의 싸움은 이처럼 아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부정적인 정서와 사고를 매우 강력하게 심어준다.

부정적인 영향력은 대부분 평생에 걸쳐 지속되기 때문에 그것을 끊는 것은 꽤나 길고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이해가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왜 이렇게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운 일이 되었는지, 왜 이토록 나는 괴롭고 외로운지.

결국 이해가 되어야 수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수용이 되어야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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