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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Dec 09. 2019

1. 엄마의 전화

12월 2일 월


문화센터 미술 수업을 받고 있는데 전화기 진동음이 계속 울렸다. 

이 시간에 누가 나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문 밖으로 나가서 받았다. 


"큰애야.. 웬만하면 안 하려고 했는데, 오늘 막내랑 병원 다녀왔는데 

내일 오후 5시에 내과 담당의가 자제분이랑 꼭 같이 오라고 간호사실에서 전화가 왔다. 

내일 오후에 시간 되니?"


잠시 통화가 중단된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 막내가 계속 다니더니 힘든가 보더라. 

오늘은 짜증을 내는 듯해서 내일 또 가자 소리를 못하겠다. 

네가 시간 된다면 함께 가려고.."


"오늘 갔을 때 의사 만났어요?"


"만났지. 주말쯤이면 퇴원해도 된다 했거든.. 그런데 간호사실에서 전화가 온 거야..

 다른 과 의사가 보자는 것 같은데.."


"네. 조퇴 내고 오후에 갈게요."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던 물이 잠시 멈춘 듯이 순간 주위가 조용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엄마의 가슴이 느껴졌으나 애써 외면하고 내일의 일정을 재빠르게 확인하며 동선을 짰다. 월말이라 업무가 바빠지는 때인데 다행히 구청에 들르려고 일정을 빼놓았던 시간대였다. 


12월 3일 화


예정보다 조금 일찍 조퇴를 하고,  

구청에 가서 발급받은 서류를 놓고 가려고 집에 잠시 들렀다. 


오후 3시 15분

내비 앱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15분쯤의 여유가 있었다. 

구청에서 받아온 서류는 홀더 파일에 끼우고 안방 서랍에 넣고 꼭 닫았다. 

주방에서 컵에 물을 따라 반쯤 마시고 잠시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러는 사이에 15분이 흘렀다. 

편한 옷으로 바꿔 입고 친정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나와있는 엄마는 엊그제 봤을 때보다 더 구부러진듯한 모습이었다. 


엊그제 일요일 문화센터 회원 전시회에 엄마를 모시고 갔었다. 

아버지가 요양원에서 병원으로 옮긴 후 매일같이 다녀오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가고 싶다고 하시기에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도심을 달려가 그림 보여드리고 점심도 함께 하며  어릴 적 공부 안 시켜준다고 가출해서 서울 친척집에 올라왔었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다. 1950년대 초반 이야기를

그 친척집이 종로에 있었다며..

문화센터 회원 중에 아버지와 연세가 같은 최고령자 여사님의 작품 앞에서 사진도 찍으시고 별거 아닌 취미생활로 그림을 그리는 나이 든 딸의 작품을 초등학생이 학예발표회에서 대상을 받은 것 마냥 좋아하셨다. 


토요일에 전시회 당번하고, 찾아온 친구랑 긴 대화를 나누는 통에 주말에 완성하려던 연구년 계획서를 마무리하지 못해서 전시장에 가지 않으려 했었는데 좋아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망설이며 알리지 않으려 했던 옹색한 마음 구석 한쪽이 저려왔다. 


주차를 하고 올 테니 기다리고 계시라 전하며 인사동 골목 한편에 엄마를 세워놓고 늘 다니던 주차빌딩에 주차하고, 불과 5분 정도의 거리인데도 어린아이 혼자 집에 놓고 잠시 장에 다녀오는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니 엄마가 서있던 곳에 계시지 않았다. 여기저기 둘러보니 골목 안쪽 꽃집 앞에서 나를 보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내가 꽃다발 사주려고.."

"안사도 돼!"

"내가 언제 또 와 볼지 모르잖니!"

별생각 없이 전하는 말이었을 텐데 이 말에 한구석이 또 저려왔다. 

"알았어. 그럼 장미 한 송이만 사세요."

"그래."


꽃집에서도 실랑이를 벌이다가 들고 나온 것은 장미 한 송이가 아니라 장미 꽃다발이었다. 

2년 전 전시회 때도 받았는데 리본에 글씨까지 쓰여있는 것을...

인도 여행 다녀와서 열렸던 그룹 전시회는 알리지도 않았는데 잠시 또 한쪽이 찌르르했다. 


3층에 있는 갤러리는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한 손은 지팡이를 짚고 한 손은 난간을 잡고 오르는데 다행히 엄마의 숨소리는 거칠지 않았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엄마를 따라가며 이러다 나중에 나중에 엄마가 혹여 계시지 않을 때 전시회를 또 하게 된다면 내 손으로 꽃을 사서 엄마의 몫으로 놓아야 되는 거겠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유난히 고운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있는 거리를 지나 오래된 국밥집에서 엄마의 지난 시절 이야기도 들었었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찍은 사진을 친척들 밴드에 올려달라기에 해드리고 되돌아섰던 게 이틀 전이다. 그날은 참 고왔는데 오늘은 뭔가 조금은 기운이 빠진 모습이다.


차를 세우고 조수석 문을 열어드리고 옆에 서서 지켜봤다. 내차는 높이가 있는 SUV인데 엄마는 한 번에 올라가지 못해 가끔 문틀에 머리를 찧곤 한다. 미리 부축하면 사양하니 지켜보고 있다가 올라가지 못할 때만 살짝 도와야 한다. 지팡이와 가방을 던지듯 먼저 조수석 한쪽에 놓고, 머리와 상체를 들이밀고 한 손으로 문틀을 잡고 한쪽 다리를 올린 후 나머지 다리를 잡아끌어당기면 앉기에 성공이다. 자리를 잡으면 안전벨트를 매고 가방을 무릎 위에 놓고 두 손으로 꼭 움켜쥐면 출발 준비 끝이다. 

"이제 가자!"


가벼운 폐렴 증상이고 노환이라 음식물 일부가 기도로 넘어가서 그런 것이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 했었다. 폐의 염증은 좋아졌고 식사는 못 하고 유동식으로 조금씩은 드시지만 요양원에 있을 때는 밤에 주무시지 않고 소리를 많이 냈는데 병원에 온 후로는 조용히 잘 지내신다 했었다. 동생들과 엄마가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으로 옮기고 입원한 지 열흘이 되는 날이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엄마의 지나간 세월의 스토리가 이어지는 사이사이에 아버지의 근황을 물었다. 새로운 소식은 달라진 아버지의 나이였다. 본인은 101 살이고 엄마는 두 살 위라고 한단다. 


간병인이 아버지 기저귀를 사 오라고 했다며 엄마는 병원 입구에서 내리고 주차를 하러 안쪽으로 들어가니 차가 많았고 생각보다 큰 병원이어서 약간 안심은 되었다.  오전에 오면 주차를 할 수가 없어 엄마를 내려드리고 주변을 빙빙 돌았다고 동생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다행히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서너 대 기다리고는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저귀 보따리를 들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엄마를 다시 만났다.  입원실은 6층이라고 했다. 기저귀를 받아 들고 올라가니 오가는 사람은 많았지만 분위기는 밝은 느낌이다. 

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은 대략 한 달 만이었다. 


82세의 엄마가 더 이상 아버지를 돌보기가 힘들어 요양원으로 모신 때가 올 6월쯤이다. 키가 큰 아버지를 서울 시내의 요양원에서는 받아주려고 하지 않는다며 엄마가 알아본 곳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곳이었다. 12년간 엄마가 돌봐왔던 환경에서 여러 명의 환자와 낯선 장소에서 그래도 예상보다는 잘 지내고 계셨었다. 밤에 잠을 주무시지 않고 침대 난간을 자주 두드려서 같은 방에 있는 환자들이 힘들어한다는 하소연을 담당자가 하기는 했지만, 잠깐의 면회 시간에 봤던 아버지는 생기가 있어 보였고, 팔이 저리고 아파서 난간을 두들기면 좀 덜해서 그런 거라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었다.  


6층의 입원실에서 본 아버지는 한 달 전에 요양원에서 만났을 때보다는 아주 편안한 얼굴이었다. 맑고 순한 느낌에 약간의 온기마저 있었다. 너무나 다른 느낌에서 오는 설명하기 어려운 직감적인 것이 있었다. 


“ 아버지, 나 왔는데, 큰 딸 ”

목소리 대신 눈빛으로 아는 시늉을 하신다. 


“아버지 몇 살이야?”

“101살.”

“엄마는?”

“나보다 두 살 위지..”


요양원에서 앰뷸런스로 병원으로 이동한 후부터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했다. 

84에서 거의 이십여 년을 건너뛰었다. 


“아버지, 손자 있는 거 알아?”

답이 없고 멍한 표정이다. 

“아버지, 손자 한 명 있다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는 표정에 답이 없다. 


아들애한테 문자를 보냈다. 할아버지 병원에 왔는데 영상통화했으면 한다고..

학회 일로 회의 중인데 잠깐 나와서 한다는 문자가 왔고, 곧바로 전화기 화면에 아들애 얼굴이 보였다. 

전화기를 아버지한테 보여줬다. 


**야!”

큰소리로 아들애 이름을 불러서 깜짝 놀랐다. 아들애의 인사말이 있었고 손을 흔들어 보여주라는 나의 요구에 웃으며 제스처를 하는 것으로 짧은 통화가 끝났다. 

손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는데, 얼굴 보고 금방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니 관계는 잊어버렸지만, **이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애한테 문자를 보냈다. 


 - 할아버지한테 너는 사랑하는 상대인가 봐!!! 생생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보면 -

 - 느닷없었겠지만, 할아버지 상태가 좀 그래서 연락했어. 나중에 설명해 줄게.-

 - 담에 병원 갈 때 나도 델고 가 -

 - 그래 -


아들애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 친청 집 아래층에서 살았었다. 어린이집에서 하원 할 때 내가 데리러 갈 수 없는 상황이면 아버지가 대신 가곤 했었다. 하원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내가 퇴근하는 기미가 없으면 먼저 전화를 하시곤 했었다. 늦게 오냐며..

가까운 거리지만, 할아버지 손을 잡고 골목을 돌아 마트를 지나 집에까지 오는 동안 어떤 모습이었는지 설명을 하시곤 했었다. 


오늘은 놀이터에서 흙장난하고 있더라..

집으로 오는 골목길에서 여자아이와 인사를 하더라..

마트에서 뭐 사달라고 했는데 내가 지갑을 안 가져가서 그냥 데리고 왔다. 다음에는 지갑 꼭 들고 가야겠다.  


어린이집 체육대회에 5살 어린애 한 명에 4 식구가 가기도 했었고 그때 찍은 아들애의 사진은 항상 아버지의 침대 맡에 있었다. 요양원으로 가시기 전까지...

지금은 5살이 아니라 23살의 청년인데 그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도 크게 불러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누군가에게 관계가 아닌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의사를 만나러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되뇌었다. 다음에 만나러 올 때는 내 이름을 물어봐야겠다는 것도...


담당 간호사가 알려준 소화기내과는 3층이었다. 지팡이를 짚는 엄마가 앞서서 가고 나는 뒤를 따랐다. 자제분들을 보자고 했던 의사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검사 결과 사진을 보며 설명을 했다. 


“폐에 염증이 있고 열이 있어서 입원하셨는데 환자분이 설사를 심하게 계속해서 대장내시경 검사를 했습니다. 대부분 이렇게 깨끗한 상태인데 여기 부분에서 혹이 보였습니다. ”


의사가 가리킨 부분은 혈관이 내비치고 불룩하게 보였다. 다른 부위와 확연하게 다르고 문제가 있어 보였다. 


“혹이 있는 부위를 떼어 조직검사를 했는데 암세포가 발견되었습니다. 연세도 있으시고, 소화기 상태도 좋지 않고, 치매도 있으시고, 몸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데 어떻게 하실 것인지 가족 분들이 결정하셔야 해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저희 병원은 암 치료를 할 수 없는 곳이니 치료를 결정하시면 대학병원 급으로 자료를 전부 이관해드릴 것입니다. ”


“혹은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가요?”내가 물었다. 

“5 센티 정도입니다. ”

“지금 환자 상태로 치료는 가능할까요? ”

“호흡기내과로 입원하신 거라 제가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환자의 증상이 있어서 검사를 했더니 결과가 이렇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전 주치의도 아니고요. 가족 분들이 결정하시면 저희는 그에 따른 준비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조심스러워하는 의사의 말투에서 충분히 짐작되는 바가 있긴 했지만 나나 엄마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3층에서 6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내려가는 것들만 있어서 올라가는데 시간이 걸렸다. 

입원실에 가서 아버지를 다시 보고 두 사람이 번갈아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아버지한테 엄마한테 인사를 하라고 시키고 해맑게 손 흔드는 것을 보며 돌아서는데 담당 주치의가 회진을 하러 들어섰다. 나와 엄마를 복도로 불렀다. 


“소화기 내과에서 설명 들으셨지요?”

“네. 좀 전에 듣고 왔습니다. ”

“오늘부터 암환자로 등록은 해드릴 거고요. 어떻게 하실 건지 결정해서 알려주세요.”

“네. 가족회의해야지요.”

짧은 대화를 하며 돌아서는 내게 의사의 손길이 전해졌다. 

이 병원은 참 친절하다는 느낌과 함께 따뜻한 손길이 위로의 제스처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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