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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의 담소 Oct 22. 2023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다

생애 첫 드레스 파티

 내 인생엔 로맨스 주인공 같은 이야기가 몇 개 있다. 몇 가지만 이야기하자면, 돈과 인기가 많은 남학생이 왕따를 당하는 여학생을 좋아하는 이야기. 예쁜 드레스를 입고 맨발로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비운의 여주인공 이야기가 있다. 이번 에피소드는 비운의 여주인공이 된 이야기이다.


 대학교의 필수 과목 중 채플이 있었고, 한인 교회에 매주 주보를 받아가면 채플이 인정되었다. 거기서 한 한국인 유학생 오빠를 만났다. 교환학생을 가던 때만 해도, 나는 남자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예배당이었다. 그는 처음 보는 한국 여자애를 힐끗 보곤 그 여자애가 앉아 있는 의자의 끝에 앉았다. 예배가 끝나고 보니, 자신의 남동생과 동갑인 한국 교환학생이라는 것이다. 처음은 호기심, 그다음은 동생 같아 자꾸 챙겨주고 싶은 마음, 마지막은 호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한인들이 모일 때면 보았다. 어느 날은 술도 잘 못 마시는 그가 나를 기숙사에 데려다 주기 위해, 파티를 마지막까지 버텼다. 파티에서 친구들이 자꾸 붙잡자, 그는 내 손을 잡고 도망을 나왔다. 그렇게 영화도 보고 밤엔 드라이브를 나가 별도 보았다.


 우리는 만났지만 공식적이진 않았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나도 물어보고 싶다. '뭔 개소리야?' 우리는 연인이지만, 그는 남들에게 밝히기를 거부했다. 늘 조용히 만나야 해서 자주 보지도 못했다. 그와 같이 있고 싶은 나와 반대로, 그는 남동생의 무리들과 놀러 다니기 바빴다. 일주일에 1번도 보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황금 같은 교환학생 시기에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끝내자며 시간을 갖자고 했다. 나중에 헤어지고 알았는데, 나 이전에 교환학생 친구에게 상처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일부러 나에게 정이 들까 봐 공식적으로 사귀지 않겠다 했고, 자주 보러 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버튼 끄듯이 단번에 꺼지겠는가.


 그 주 주말에 Winter Formal Party가 있었다. 미국에선 겨울 시즌이 다가오면, 학생들이 슈트와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한다. 그것을 Winter Formal이라고 한다. 참가자 명단은 페이스북으로 확인이 가능했고, 애프터 파티에서 그가 참가한다고 표를 누른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던 드레스 파티를 가는 것이 설레었다. 물론 애프터 파티에 그가 온다니, 누구보다 돋보여야 했다. 미국 친구와 차를 타고 아웃렛을 갔다. 친구는 드레스를 처음 고르는 나를 열심히 도와주었다. 새하얗고 타이트한 드레스와 굽이 높은 구두를 골랐다.


 파티가 열린 날에 나는 빛이 났다. 기숙사를 나가자 모르는 여대생들이 "드레스 너무 예쁘다"라며 칭찬을 해주었다. 코트를 맡기고 들어가자, 몇몇 남학생들은 나중에 춤을 추자고 했다.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와중에도 신경은 온통 애프터 파티에 가있었다. 파티가 끝날 무렵즘 친구들과 애프터 파티에 갔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이 가득했다. 파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온 것 같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친구들이 기숙사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에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포기하고 기숙사로 돌아가야겠다고 선택했다. 밤길이 어두워, 한인 유학생 오빠 한 명이 기숙사 가는 길을 배웅해 주었다. 영하의 온도에, 레깅스도 신지 않은 맨다리라 너무 추웠다.  발은 구두 때문에 불어 터져 있었다. 구두를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서 돌아가자, 같이 가던 오빠가 맘 같아선 엎어주고 싶을 정도라며 안타까워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공사를 하는 건물을 지나가야 했고, 그 도로엔 자잘한 돌이 바닥에 깔려있었다. 오빠는 자신의 신발을 신겠냐며 물었지만, 남의 발이 다치는 걸 원하진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제일 먼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며 울었다. 발바닥에선 피가 나고 있었다. 파티에서 돌아온 것을 들은 친한 언니는 내 방에 와서 우는 나를 달래 주며 재웠다.


 이별로 엉엉 울었던 첫 기억이다. 그는 그날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느라 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 시간이 너무 허망하고 아까웠다. 그런데 한참 후에 한국에서 지인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교환학생을 가서 뭐든 경험하는 건 좋다고 생각해. 사랑도 이별도 그중 하나지. 언제 또 그래보겠어." 이제와 보니, 그러네 모든 건 다 경험이고 추억이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원래는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편지 한 통 남기고 싶었다. 이젠 시간이 정말 많이 지났지만, '여기가 대나무숲이다' 생각하고 외쳐본다.


Dear. almost lover

 끝은 정말 막장이었지만, 나는 재밌었어. 같이 봤던 밤하늘의 별은 예뻤고, 추웠던 겨울 공기 속 오빠의 손은 따뜻했어. 오빠가 누군가에게 상처받았다고, 상관도 없는 나에게 상처를 줄 권리는 없어. 비밀 하나 알려줄까? 금은보화보다 값진 나를 놓쳤네? 잘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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