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인가 싶다. 한 사람이 두 사람몫의 인생을 살아낸 다는 것.
도연은 그런 자를 안다. 아주 잘 안다. 그런 사람과 십 년을 함께 살고 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은 엄마로서 그저 회사를 다니고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고 설거지를 하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양육에 지나지 않았을 뿐 온전히 본인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였다. 그런 능력을 상실했는지 모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기 살기 바쁜 이 시국에 온전히 본인의 삶을 살아낸다느니 본인을 찾아 떠난다느니 허황된 소리를 지껄이는가 싶다. 아이들에게 인간대 인간으로서 엄마로서의 사랑을 주기보다 그저 로봇트 처럼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끝이었다. 그런 엄마를 닮아가는 것 같아 슬프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었다. 본인의 의지로 본인의 힘으로 제대로 살아낸 기억이 없다. 무언가 일을 저질러 놓은 뒤 한껏 겁내고 한껏 두려워하는 동안 주변의 사람들은 늘 도연의 뒤치다꺼리 하기에 바빴다. 그저 욕먹고 나면 말일이었다. 그렇게 도연의 삶은 여태껏 남의 힘을 빌어온 인생일지 모른다.
그런 그녀 앞에 두 아이가 생겼을때도 그다지 힘들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 영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있다면 가만히 있던지 같아 무언가를 바삐 하든지 간에 도연의 마음의 조금은 놓였다. 아이들도 그랬다. 그가 별일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 시야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안정을 찾았다. 도연에게서 그러니까 엄마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무언의 안정감이라는 게 그에게는 있었다. 그렇게 그는 오늘도 도연의 삶까지 꾸역꾸역 살아내는 중이다.
도연은 결정권을 늘 이양하다. 잘할 자신이 없고 이제껏 잘해온 적도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온 동네 시끄럽게 소문낸 뒤 며칠이 되지 않아 그만둘 뿐이었다. 그간 아이들의 등하원시간을 조정하고 부모가 필요한 시간대에 아이들곁에있어주는 것 그깟 알바를 할 뿐인 도연이 아니라 남편 영수였다. 영수는 도연의 미소가 보고팠다. 아이들의 까르륵 웃음소리가 고팠다. 왜 우리 집에선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도연은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모든 걸 그만두면 좋겠다고. 내가 조용히 사라지고 난 뒤 가족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현실에 적응해 다시 살며 엄마의, 아내의 공백 같은 건 영영 느끼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 유독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기만 한 도연은 자신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어쩌면 사회에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위로받고 싶어 험한 말로 자신을 자해하는 것이 아닌 순도 100%의 진심이다. 15년간 회사를 다녔지만 왜인지 빚은 그대로이고, 그 빚의 이유는 영수도 모른다. 도연만 알고 있다.
그나마 살면서 인간구실을 해본 건 직장 다니는 순간뿐이었다. 직장을 다니며 생긴 마음의 생채기는 모두 가족들이 감당해야 했지만.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고 나서 남은 건 2400만 원의 빚이다. 도연은 떠나고 싶다. 멀리 훌훌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고 싶다. 그사이 영수와 아이들이 온전히 평안을 찾아 행복했으면 좋겠다. 영영 엄마를 잊고 모르고 살았으면.
그게 도연이 해줄 수 있는 가족에의 마지막 선물임을 알고 있다. 영수는 오늘도 웃지 않는 도연을 살리기 위해 함께 걷고 함께 장을 보고 함께 이야기한다. 여전히 도연은 웃지 않는다. 죽고싶다기보다 살고싶지 않은, 하루하루 꾸역꾸역 버텨가는 인생을 사는게 너무 고통스럽다. 길이 영영 막혀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