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면접을 앞두고 몸이 아프다
면접을 앞두고 나의 원래 계획은 이랬다.
1. 전날에 미리 본사 근처 숙소에 안전하게 도착한다.
2.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면접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올 때까지 리허설을 해본다.
3. 다음 날 챙겨갈 정장과 구두, 손목시계 등을 준비해두고, 기업 분석 자료를 읽어본다.
(정장과 구두는 정장 공유 플랫폼에서 일주일 전에 미리 빌려 택배로 받아두었다)
4. 좋은 컨디션을 위해 푹 잔다.
5. 다음 날 일어나 예약해 놓은 미용실로 가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매우 좋은 컨디션으로 면접장으로 향한다.
허나 내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얼마나 있던가. 면접 전날 아팠다.
감기인지 단순한 두통인지 긴장한 탓인지 몸이 좋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 온 나라가, 코로나로 난리통일 때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면접장에서 온도를 쟀는데 높게 나오면,
아마 나는 면접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괜찮겠지? 설마 이 잠깐 사이에 코로나 걸리겠어?'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몸이 아프니 조급해졌고 마음도 아팠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끝없이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동안 준비해왔던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중얼중얼거리며
약을 먹고 잠들었다가 깼다가, 다시 밥먹고 약먹고 잠드는 일을 반복하는 거였다.
'난 결국 최종에서 떨어질 운명인건가.'
운명. 힘들 때 기대면 그만큼 편한 단어도 드물었다.
운명의 뜻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저치.'
우리는 운명이란 말을 알게 모르게 참 많이 쓴다.
운명적인 기회. 운명적인 사랑. 운명적인 만남. 운명적인 인연.
별 거 아닌 흔한 단어에도 '운명'이란 말 하나 갖다 붙이면 참 낭만적으로 바뀐다.
"우리가 만난 건 운명이었어."
"그때 마침, 내가 그 공고문을 본 거야. 내가 여기 회사에 온 건 운명이었다니까!"
하지만 나에겐 그런 운명같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서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긴 적이 많았다. 뭐 하나 쉽게 이루어지는 게 없었다.
날이 좋아서, 예감이 좋아서 내 짝이 나타날 거라 믿었던 소개팅은 매번 허탕 치기 일쑤였고
친구나 직장동료 등 운명의 끈이라 느꼈던 내 인생의 인연들은 대부분 노력하지 않으면 이어지기 쉽지 않다.
운명이라 믿고 졸업 후 시작했던 첫 스타트업에서는 월급도 매달 못 받고 버티다 쫓겨났다.
내가 잘한다고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영역에서의 성공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내 재능이 흔하다는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저 보통의 삶을 사는 것이 내겐 너무 어려웠다.
공무원 시험을 볼 때도 그랬다.
1년 안에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내겐 2년이나 시험 준비를 하고 있을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당시 1년에 한 번씩 국가직과 지방직 시험을 볼 수 있었다.(서울시 시험도 있지만 나는 서울에 살고 싶지 않았기에 관심이 없었다)
국가직이 3개월 정도 지방직보다 먼저 있었고 그때 나는 내가 천식을 앓는다는 걸 알았다. 어느 날부터인지 도서관에 앉아있으면 숨이 막혔다. 정신적으로 힘들어서가 아니라 진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계속 마른기침이 났다. 도서관 특성상 작은 기침 소리 하나도 방해가 될 수 있기에 그렇게 아침 일찍 좋은 자리를 맡으러 도서관에 출석했다가 포기하고 다시 집에 돌아오기 일수였다.
하지만 원인을 몰랐다. 그냥 감기인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천식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가족력도 없었기에 천식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었을 뿐 정확한 증상을 몰랐다.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아니 무엇보다, 지금 당장 눈앞에 시험 볼 일이 급한데 이게 뭐 대수랴. 그런데 국가직 시험장에서 일이 터졌다. 100문제 중 50문제를 넘게 풀었을 때쯤 또다시 숨이 막히고 기침이 토할 것처럼 나오려 시동을 걸었다. 사각사각. 주변에는 시험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이따금 필기 소리만 들렸다. 내가 지금 마른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하면 한참 동안 지속될 것이고 그러면 분명 주변에 피해를 끼칠 것이다. 중요한 시험 중에 주변까지 생각해야 하다니. 하지만 상도덕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결국 시험 중간에 감독관을 향해 손을 들었다.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화장실에 보내달라고. 시험 더 안 쳐도 되니까 제발 내보내 달라고. 귓속말로 호소했지만 시험감독관은 단호했다. 시험 중간에 나가는 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결국 새어 나오는 마른기침을 참기 위해 얼굴이 벌게진 채 고통 속에 개를 숙인 채 남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이때를 계기로 나는 이게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제야 병원을 찾았는데 천식이란다.
"천식이요? 살면서 한 번도 걸려본 적 없는데. 그거 별로 심각한 거 아니죠?"
나의 경우는 스트레스성 천식.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과정 속에서 천식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거다. '아 나 시험 준비하면서 그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구나.' 하긴, 주말도 쉬지 않고 새벽 두 시에 자가며 나를 몰아쳤으니. 몸이 지쳤을 만도 하지. 하지만 좀만 버텨주라. 이제 곧 지방직 시험이야.'
내겐 아직 지방직 시험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약을 처방받아 꼬박꼬박 먹으며 컨디션 조절을 하려 애썼다. 내가 주력했던 건 지방직이었기에, 어찌 보면 일찍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열심히 준비한 시험을 제대로 풀어보지도 못한 채 아파서 못 봤다면 얼마나 자괴감에 빠졌겠는가. 물론 그땐 그렇게 미친 듯이 준비한 직장을 3년도 채 안 돼서 관둘 거란 건 몰랐겠지만.
..
.
“아악!! 그 놈의 차별화된 답변!! 인간이 사는 게 다 비슷한데 어찌 차별화된 답변을 내놓으라는 거야!!"
몸이 너무 아파서인지 혼자 갑자기 악다구니도 써봤다. 그때 카톡이 울렸다. 친구였다.
[파이팅]
별 미사여구 없이 담백하게 남겨진 세 글자가 얼마나 고맙던지.
엄마의 말도 떠올랐다.
"살다 보니까, 아등바등할 때보다 조급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내 자리가 생기기도 하더라. 내 것이 되려고 기회가 오기도 하더라. 너무 조바심 내지 말자."
나는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약을 먹고 비몽사몽 간에 또다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