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관둔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내가 공무원을 퇴사했다는 걸 알면 묻는 단골 질문이 두 가지가 있다.
“왜 관뒀는데?"
"공무원 관두고 뭐하고 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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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그날의 나는 십 대나 이십 대 때보다 나름 많은 걸 깨달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자 교만이었다.
퇴사 후 5년이 지났다.
지금 '퇴사할 당시의 나'를 돌아보면 분명 도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리라.
우리나라에서 '공무원'을 해도 행복하지 않으면 대체 난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자괴감에 해외에서의 삶을 목표했던 나.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해외에 가는 길이 막혀서 다행일지도 몰랐다. 이후 비정규직으로 살면서, 또 중소기업에서 다양한 취업 현실을 겪어보고 지금에서야 나에게 잘 맞는 직무를 할 수 있는 직장을 만났으니까. 국내에서 버틴 게 그땐 힘들었지만 나름 선방한 셈이다. 하지만 그 당시엔 건강 문제로 뜻하지 않게 국내에 남는 신세가 되었던 터라, 미래를 알지 못했던 내겐 좌절도 방황도 남들이 함께 겪어줄 수 없는 온전한 내 몫이었다.
그저 '공무원 퇴사자'로 낙오된 것처럼 보이는 나 자신을 매일 눈뜨며 견디는 일은 굉장히 버거웠다. 어쨌든 하루하루 살아내야 하는 일이 고통스럽기도 했다. 차라리 어디든 도망가는 게 편할 정도였다. 오늘도 공무원이 되기 위해 미친 듯이 하루 종일 자유를 포기하고 독서실에 갇혀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가끔은, "넌 이 사람들의 자리를 빼앗은 거야"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렸던 순간들도 있다.
내 마음은 여전히 젊고 뭐든 도전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기회만 되면 다시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사회적으로 이 시기는 특정 직업으로든 혹은 성취 기반을 마련한 모습으로든 '증명'을 시작해야 하는 때였다. 그 어느 때보다 내면적으로 행복하고 편안한데도 이것을 증명하지 못하니까, 나를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을 만날수록 움츠러들기도 했다. 공무원일 때는 내 마음이 문드러지든 지금 얼마나 불행하든 그냥 사람들을 만나 "공무원이야"라고 말하면 적당히 잘 산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엄청난 성공은 아니지만 '아 이 친구는 웬만큼은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왔나 보다 앞으로 굶어 죽진 않겠구나'라는 느낌. 하지만 퇴사 이후에는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걸 온전히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조직이 주는 안정감은 조직을 나와보고 나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공무원을 퇴사한 이후 처음엔 공공기관 비정규직으로도 살았다. 공무원이었던 내 경력은 공공기관에서 일을 하기에 꽤 매력적이었던 모양인지 아니면 당시 운이 좋았던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물론 "공무원을 왜 관뒀어요?"라는 물음은 "나이가 어떻게 돼요?"라는 질문만큼이나 계속 따라다녔지만. 나는 비정규직이 편했다. 돈은 더 적고 보장받는 것들도 적지만 그만큼 맡겨진 책임의 무게도 적었다. 6시에 칼퇴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정규직 공무원들 사이에 섞여 있는 비정규직 직원이 먼저 퇴근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 외 수당이 없으니까 퇴근하는 건 당연한 거였을까. 나와 함께 일했던 새내기 신입 정규직 공무원은 늘 나와 동시에 퇴근하지 못했으며 선배들의 눈치를 보다가, 오늘도 일찍 가긴 틀렸다며 내게 부럽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마 내가 공무원 생활을 해보지 않았다면 "내가 부럽다고? 배부른 소리 하네."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녀가 충분히 이해되었다. 난 좋았다. 퇴근 이후 마음껏 좋아하는 책을 도서관에 가서 빌려보고 주말에는 편하게 여행도 다니고. 명절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상여 품목이 다른 것도 나는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택한 삶이니까. 하지만 역시 계약이 끝날 때쯤 닥치는 불안은 남아있었다. 계약이 끝나고 프리랜서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을 무렵, 우연히 조건이 맞는 중소기업을 소개받았고
나는 퇴근 후 남는 시간에 차근차근 프리랜서의 삶을 준비했다.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꾸준히 진행하며
책으로 썼던 원고를, 내가 평소 동경하던 출판사와 계약했다. 강연들도 했고 인세도 받고 유튜브 광고 수익도 조금씩 나서 기부도 할 수 있었다. 비록 큰 성취는 아니지만 내겐 조직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번 돈이므로 참으로 의미 있는 행복이 있었다.
목표가 있고 미래가 기대되었기에 이 모든 게 나에겐 공무원일 때보다 행복했지만 물론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늘 모든 현실은 장단점이 있듯이 나는 여전히 주변 사람들, 엄청 친하진 않으나 어중간하게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공무원을 퇴사한 채 불안해 보이는, 거꾸로 된 인생을 사는 한 서른 언저리의 청년이었다. 대개 이십 대의 방황을 끝내고 안정적인 삶을 찾아가는 주변 친구들에 비해 나는 역으로 걷는 듯 보이니 표현은 대놓고 안 해도 은근 걱정을 하셨나 보다. 늘 그렇듯 엄마가 옆에서 "넌 뭘 해도 잘 살 거라며" 힘이 되어주셨다. 하지만 힘들게 공부해서 공무원이 되어 독립했던 딸이, 집에 다시 돌아왔으니 걱정이 안 되셨을까. 하지만 그런 미안함은 사실 힘든 것도 아니었다.
중소기업!
아 한국에 얼마나 좋고 발전하고 있는 중소기업도 많은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다녔던 곳의 일상은 그리 녹록지 못했다. 공무원일 때 당연하게 받았던 근로자로서의 대우를 상실해버린 곳. 왜 중소기업을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참다못해 공무원 시험을 보게 되는지 느낄 수 있던 일상들. 그래 맞다. 왜 너는 사서 고생을 하냐고 묻는 질문들이 이상하지 않은 일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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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녔던 곳은 생긴 지 5년이 채 되지 않은 곳이었다. 사실 평범한 나의 뭘 보고 거기서 뽑았겠는가. 아마 공무원이었다는 기대였겠지. 아니나 다를까 나는 어느새 내 고유 업무 외에 직원들의 월급과 4대 보험 관리, 사장의 업무 대행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사장님의 신뢰는 무한했으나 나는 일개 직원으로 살고 싶었기에 그 신뢰가 버거웠다. 노동법이나 4대 보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나는 그 업무를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며 고객들에게 욕을 먹어가며 새로 익히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 들어가기 전에 계약서를 쓸 때 맡게 될 거라 예정되었던 업무들과는 전혀 다른 예상치 못한 업무들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누가 그랬더라. 중소기업에 다니면 일당백이 되어야 한다고. 공무원일 때는 적어도 내가 맡은 업무에 대해서 책임지고 다른 일은 해당 타 부서의 협조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시트콤의 장면들처럼 놀라움 그 자체였다. 시트콤은 주인공을 보며 내가 웃고 떠들고 즐길 수 있었지만 여기는 현실. 내가 시트콤 속의 당사자. 웃픈 날들이 계속되었다. 컴퓨터가 왜 고장 났는지 알아내야 하는 건 기본이요, 갑자기 정전되면 그 원인을 찾아 내 각종 관련 업체에 연락해 해결을 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늘 회사를 위해 외부 업무를 하느라 바쁜 사장님은 거의 사무실에 없었고 전화나 메시지로 주로 지시를 하셨다. 6시 이후조차 하도 전화를 하기에 어떤 날은 전화를 꺼놨더니 왜 전화를 꺼놓냐며 나는 요즘 애들을 이해할 수 없다며 버럭 화를 내셨다.
체계가 없어 갑작스럽게 터지는 일들은 매일 차고 넘쳤다. 그리고 나는 왜 공무원일 때 관내를 청소해주시던 아주머니가 모든 회사에 있는 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걸까. 누군가 청소하지 않으면 사무실은 늘 먼지투성이였고 당연하게 탕비실에 놓여있을 거라 여긴 간식들은, 내 월급으로 해결. 하지만 괜찮았다. 이런 것들을 상쇄시킬 정도로 내가 이곳에 입사를 결심했던 큰 메리트가 있었으니까. 체계가 없지만 체계가 없는 것을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않으시는 너그러운(?) 사장 덕분에 코로나 전부터 유연근무제를 본의 아니게 허락받았고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재택 근무조차, 가끔은 허락받을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이었다는 점이다. 갑갑함을 싫어하는 성격상 이는 내게 다른 단점을 모두 상쇄시킬 정도로 잘 맞았다.
"오늘 비가 많이 오네. 그냥 집에서 컴퓨터로 일해. 사무실 멀잖아."
일은 많았지만 가끔 이렇게 갑작스러운 너그러움을 발휘하는 사장님 덕에, 나는 폭풍 집중하여 업무를 얼른 끝마치고 여가시간을 즐길 수도 있었다. 주말에 근무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무실이 아닌 컴퓨터만 있으면 카페에서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나는 그냥 너무 좋았다. 아니 그럼 대체 문제는 뭐였을까.
내가 중소기업을 다닐 때 공무원일 때와 가장 큰 차이는, 월급날이 되면 드러난다. 체계가 없음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던 너그러운 사장님이 월급날이 되어도 정확하게 월급을 주지 않았다는 거다.
“사장님. 이번 달 월급 언제 주시 나요?”
“아 그거, 일단 다른 직원들 주고 다음 주쯤 줄게요. 아직 돈 들어올 데에서 안 들어왔네.”
한참 후. 퇴근할 때쯤 문자가 온다.
[아참 근데 얼마 주기로 했지?]
"......."
처음엔 ‘그럴 수도 있지. 사장님도 사장님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잖아.’라고 생각했던 날들이 점점 나를 괴롭혔다. 상여금에 대한 개념도 약간 제멋대로였다. 어떤 때는 아예 안 주고 월급까지 줄었다가 또 기분 좋을 때는, 엄청 큰돈을 명절 상여금이라며 보내왔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며, 우리 회사는 너를 믿는다며. 나는 나의 자유로운 성격만큼 그런 분위기에 곧 익숙해질 줄 알았으나 월급에는 초연할 수 없었다. 기쁨이 되어야 할 월급날이 오히려 월중 가장 불안한 날이 되니 노이로제에 걸리기 시작했다. 가끔 진지하게 말씀을 드려 변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해 두세 달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앗 바빠서 오늘 넣는 거 잊어버렸네. 내일 아침에 넣어줄게요. 하트.'
시간이 지나며 우리 사장님의 너그러움(?)도 점점 좋아졌고 공기업으로 이직한 이후 가끔 연락해서 소식을 들으면, 상도 받으시고 점점 회사도 더 발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쁜 일이다. 하지만 당시 나가 퇴사를 하지 않고 버텼던 건, 나는 이것이 ‘내가 공무원을 관두고 겪어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회는 어딜 가든 힘들다는 생각. 나는 내 자신에게 신뢰를 주고 싶었다. 나도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첫 6개월은 그냥 나와의 싸움을 한 것도 사실이다. 체계가 없지만 시간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직장은 흔하지 않기에 앞으로 천천히 프리랜서로 자리를 잡기 위한 대가. 어차피 프리랜서로의 삶은 손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기에, 내가 월급만큼의 급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래 인내하며 몇 배로 노력해야 하는지 각오했기에, 현재 내가 몸담은 감사한 직장에서 적어도 내 역할을 잘 해내며 잘 버텨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