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적이면 너무 행복해서

by 여미

몇 주 전부터 시나리오를 안 쓰고 있다.


대학원이 어그러지면서, 올해 초 회사를 (다시)다니기 시작했고 이제 거의 1년이 다 돼가고 있다. 아주 큰 계기가 아니라면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하게 될 것 같다. 지금까지 다닌 회사에서 가장 워라벨이 좋고,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기 때문에 틈틈이 시나리오를 작업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놈의 시나리오는 작년에도, 올해도 잘 써지지가 않는다. 이번에도 시놉시스만 29384729번 바꿨다. 드라마를 쓰다가 로맨스로, 로맨스를 쓰다가도 드라마로 장르를 바꾸기 시작한다. 로맨스를 쓰기에는 지금 내 안에 말랑말랑한 감성이 없고, 드라마를 쓰기에는 필력이 딸린다. 늘 나에게 묻는다. 나는 왜 시나리오 하나 완성하지 못하고 늘 쩔쩔 매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왜 시나리오를 쓰는가.


단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꿈은 굶어 죽더라도 영화 찍는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굶는 건 싫고 그것 때문에 말라서 죽는 것은 더더욱 싫으니 영화로 돈을 벌 생각을 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벤트성으로 딱 한 번이라도 장편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두 편도 아니고, 단 한 편만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꽤나 입소문이 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엄청난 대박은 싫고(사실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일이 없다) 영화를 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 그 영화? 나 봤어" 이 정도의 반응을 원한다. 곧이어 이어지는 대화는 이러하다. "근데 그 감독 왜 요즘엔 영화 안 찍지?" "글쎄. 그거 한 편 찍고 소식이 없던데, 지금 만들고 있는 거 아냐?" "10년이나 흘렀는데?" "어디선가 만들고는 있겠지"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을 한번 정도 검색해보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그대로 대화가 종료된다. 이 정도의 마무리가 좋을 것 같다.


서른이 되니 거대한 꿈은 눈 앞에 놓인 딸기잼처럼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현실 가능적인 목표로 바뀌고 있다. 내 손에 쥐어진 빵에 잼을 바르기 위해서 외국까지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 나이가 서른이고 80년까지 산다고 치면, 앞으로 50년 안에는 장편영화 한 편 투자받지 않을까, 싶다. 천만 원이든, 이천만 원이든 주는 대로 찍을 것이다. 그런데 이럴 거면 도대체 왜 찍는 거야? 싶기도 하다. 이왕 마음먹는 거면 좋은 영화 계속 만들어내서 이름도 알리고, 상도 많이 받고, 수입도 생기면 좋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작년까지는 나도 이런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시나리오 한 편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으니 근미래에는 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완벽하게 멈추기에는 실낱같은 미련이 남아 있으니(나도 그 미련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 모른다), 그 미련을 해소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한 편 정도는 제작하고는 싶다는 것이다. 그냥 그러고 싶다. 꿈이라는 것이 꼭 세상을 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여도 되지 않을까.


운 좋게 그 영화가 잘 되면 또 다음 단계가 있을 것이고, 아니면 마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매우 편해졌다. 부담도 없어졌다. 은은하게 입소문이 퍼지는 영화 한 편 만들고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가자. 이게 현재 내 꿈이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 전부터 시나리오를 아예 놓고 있다. 심지어 노트북 폴더에 저장해 둔 문서를 열어보지도 않았고, 자료조사도 안 하고 있다. 꽤 비싼 값을 주고 산 시나리오 작법서도 안 열어 본 지 오래다. 이유는 하고 싶지 않아서다. 매번 시나리오를 써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노트북을 열었는데, 쓰기 싫어서 안 하고 있다.


왜 이렇게 행복한 거야?


신기하게도, 너무 행복한 거다. 꼭 해야 하는 이유도 없었지만, 뭔가에 쫓기듯 글을 쓰곤 했었다. "너 지금 글 안 써? 지금 안 쓰면 어쩌려고 그래. 이러다가 언제 당선되고 언제 투자받고 언제 찍을래?" 글을 안으니까 내면의 다그침도 사라졌다.


안 해도 되지 않나?


언젠간 하긴 할 거다. 그런데 솔직히 꼭 안 해도 되지 않나? 안 한다고 내가 어떻게 되나? 지금 안 하고 싶으니까 안 하는 게 뭐 어때서! 오늘은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사 가지고 와서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을 읽었다. 너무 재밌어서 요즘 아껴있는 책인데, "영화"에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낭만적인 스토리 전개에 행복해진다. 글 맛이 환상적이니 커피 맛도 좋았다.


무릇 영화에서 주인공의 역할이란, 스스로 개척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인생이 모두 그렇게만 흘러갈 수만 있는가? 각자의 자리에서 꿋꿋이 제 역할을 하는 조연들도 있듯이, 나도 오늘만큼은 아니, 며칠 동안은 뭔가에 몰두하는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기로 했다. 역시 매일 능동적이면 힘들다.


수동적이면 너무 행복해서


블루베리와 바나나, 요구르트를 넣고 믹서기에 돌리고, 이 글을 쓰고 있다.

Openside의 I just wanted you를 들으며 두 손을 들고 춤을 추었다.

휘파람도 불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니 행복하다.



뭐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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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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