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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미 Sep 25. 2021

우리는 오늘도 평범하니까

오래간만에 주말 약속을 잡았다.


보통 내 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하는 편은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연락이 오고, 조금 뜸 해지면 그쪽에서 알아서 약속을 먼저 잡으니까.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약속을 만들어내려고는 하지 않는다. 비어 있는 시간들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 약속이 가득 찬 스케줄이 다가오면 '아, 책 읽어야 하는데, 브런치에 글 써야 하는데, 일기장에 고뇌가 가득 찬 이상한 글들을 써야 하는데' 라며 공연히 생각이 많아진다. 하지만 유독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녀는 항상 바쁘기 때문에 약속을 한번 잡으려고 하면 2주에서 3주 정도의 예약 대기 시간을 거쳐야 한다. 이 친구는 일을 하지 않을 때도 않는 대로 바쁘고, 회사를 다닐 때도 그런대로 바쁘다. 만날 사람들도 많고, 하고 있는 공부들도 많고 과외도 받고 운동도 하고 음악 발매도 해야 하고, 아주 바쁜 삶을 살고 있다(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학생 때 감독과 작곡가라는 비즈니스 관계로 만나다가 거의 베스트 프렌드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아마 서로의 작업이 별로라며 신세 한탄하다가 친해진 것 같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2주 전에 약속을 잡고 나는 이 날이 다가오자 괜히 신이 났다. 요즘 나의 컨디션은 최상이었고, 추석 연휴 때 책더미에 묻혀서 글만 쓰느라 집 밖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마주하는 인간이라는 생물체였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참으로 유익하고(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재밌어서(이것도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늘 댓바람으로 나가곤 한다. 우리는 성수동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각자 가져온 책을 읽고, 저녁에는 맥주 한 잔 하기로 했다.


너는 평범하지 않아


오랜만에 만나 서로 근황을 한창 이야기하다가 요즘 '평범함'에 대한 예찬을 하는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네가 왜 평범해?"라고 바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왜, 나 평범하지 않아?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어딨다고!


"평범한 사람은 주말에 남자를 만나지"


할 말을 잃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포인트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를 제외하고 카페에는 전부 커플들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남자도 아닌 이 바쁜 생물체를 만나기 위해 왜 신이 났던 거지? 그리고 또 생각해보니, 우리는 만나서는 대화는 그다지 하지는 않고, 책만 읽고 각자 할 일만 하다가 맥주를 마시면서 음악을 만들어라, 왜 안 만드냐, 영화를 만들어라, 너는 직무유기다, 서로에게 잔소리만 잔뜩 하고는 기운 없이 헤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다시 생각해보니 별로 유익하지는 않은 것 같다). 같이 작품을 만드던 시절, 그녀가 만드는 음악으로부터 세뇌를 당한 것인가, 어딘가에 중독된 것인가.


"내 친구들은 다 평범하지 않아"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고서는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문득 그녀가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해서 들춰보았는데, 무슨 해리포터에 나올법한(이상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 백과사전을 들고 온 게 아닌가(100년도 더 된 낡은 책이었다). 뭐야,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책을 읽나? 이걸 왜 읽는 거지? 그것도 도서관에서 빌린 듯(아무도 안 빌려봤을 것 같다) 바코드 스티커까지 커다랗게 붙어있었다.


나의 평범 예찬론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이 테마에 대해 계속 이곳에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하는데, 오늘따라 나도 그렇고(주말에 남자를 안 만난다는 이유로) 내 친구도 그렇고(이상한 마법책을 들고 왔다는 이유로) 왜 이리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보편적으로는 평범하지만, 때때로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들(?)이 존재하는 거니까. (그래도 이상한 마법책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내가 더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피자와 맥주를 사이좋게 나눠마시고 고샅길을 지나 건대입구역까지 설렁설렁 걸어갔다.


"여기 교토 같다"

"좋았지"

"우리 지금 교토 숙소 가는 것 같다"

"(웃음)"

"거기 파스타집 맛있었는데"

"그래, 코로나가 끝나야 할 텐데"

 

우리는 종종 좁은 골목을 지날 때면 '교토'를 떠올리곤 한다. 2018년에, 내가 연출한 영화에 그녀가 작곡한 음악으로 우리는 일본의 한 영화제에 초청되어 함께 교토에 갔었다. 4일 내내 우리는 숙소로 가는 좁을 골목길에 위치한 파스타 집에서 와인을 마셨다. 우리가 함께 만든 작업물 중에 가장 좋은 결과를 냈고, 감독과 작곡가라는 이름으로 해외에 간 것도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 종종 우리가 만나는 날마다, 장소마다, 공기마다 '교토'를 떠올리며 감상을 나누곤 한다. 오늘도 그랬다. 좁은 골목길, 어두침침한 하늘, 작은 불빛의 가게들, 우리의 꿈이 조금이나마 빛났던 교토의 밤이었다. 


서로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각자 다른 말을 하는데, 대화는 이상하게 이어진다. 집에 돌아와 루이보스 티를 아이스로 우려서 꿀꺽꿀꺽 삼켰다. 좋아하는 음악을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고, 통신사에서 공짜로 받은 캔들 조명을 켜고 침대에 반쯤 기대어 오늘 하루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너와 내가 대체로 평범한 육체와 평범한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항상' 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오늘 이렇게 맛있는 커피와 맥주를 마실 수 있었던 거야. 바쁜 척좀 적당히 하고 이렇게 평범한 하루를 나와 보내주길 바라(종종 나랑 주말에 놀아줘).


평범한 나를, 그리고 우리를 아주 칭찬해!





글 여미

커버 사진 여미

yeoulhan@nate.com


평범한 사람과 평범한 하루를 보내셨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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