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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미 Oct 03. 2021

기억 속 평범한 날들

누구나 잊히지 않는 추억이 있고, 우리는 그 추억을 평생 기억하고 있다. 냄새, 소리, 그리고 아주 짧은 찰나의 이미지가 하나의 덩어리로 응고화되어 장기 기억으로 남는다. 분명 기억이란 소우주처럼 넓고 복잡한 뇌에서 하는 일인데, 떠올리면 여러 감정들이 몰려와 서글퍼지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흐뭇한 느낌도 든다. 어떤 특별한 사물이나 사람이기에 혹은 얼마나 서프라이즈 한 상황이기에 그때 당시 내 시선을 사로잡고 황홀감에 빠져들게 하였을까, 그래서 이렇게나 오래도록 장기 기억으로 남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았으나 모두 평범한 날이었고, 평범한 순간이었다. 좋다고 느끼고 있었던 기억을 글로 적으면 특별할 거라고는 하나 없는 일상적인 순간들이다.


1998년, 내가 초등학생 때 살던 잠실 주공 아파트는 현재 고층 빌딩이 들어선 화려한 동네가 되었지만 그때 당시는 고작 4층이 전부인 작고 허름한 아파트 단지였다. 그 좁은 곳에서 우리 네 식구가 살았었고, 언니와 나는 방을 함께 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쁜 부모님은 늘 집에 없었고 언니와 나, 때때로 언니 친구와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집 앞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줄지어 있었기에 학교에 돌아와 창문 너머로 해가 지고 있는 풍경을 구경하고 있으면 교복을 입은 언니, 오빠들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노을이 져서 하늘이 주황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면, 고등학생 오빠들이 농구공을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트 단지와 학교가 옹기종기 모여있었기에, 농구공 하나 튀기는 소리도 '탕!, 탕!' 거리며 쩌렁쩌렁하게 울리곤 했다. 분명 시멘트 바닥이었을 텐데, 마치 강당에서 공을 바닥에 튀기듯이 메아리가 울렸다. 그중에 노래를 자주 부르던 고등학생 오빠가 있었는데, 윤도현의 '너를 보내고'를 그렇게나 애절하게 불렀다. 아홉 살 꼬마는 노을빛 뒤로 들리는 농구공 소리와 그가 부르는 노랫말 가사를 들으며, 그리고 교복 입은 오빠의 기다란 그림자 실루엣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었다. '내가 저 정도 자라려면 아직 멀었겠지?'


그로부터 22년이나 지났다. 내가 이 장면이 왜 장기기억으로 남았을까, 생각해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는 풍경이 아름다워 서였을까, 농구공 소리가 너무 크게 와닿았을까, 남학생이 노래를 잘 불렀나,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동네를 많이 사랑했었던  같다. 그리고 내 기억 속 대부분은 내가 사랑했던 그곳에서의 평범한 순간들이 가득하다. 한자 학원에 끝나자마자 놀이터에서 실컷 놀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차려준 제육볶음 냄새가 가득해 설렜었고, 문방구에서 자주 사 먹던 소시지를 들고 피아노 학원으로 향하면서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소시지 100개 사 먹고 싶다'라는 생각에 춤을 추듯 걸어갔었으며, 집 앞 나무 그늘에 앉아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소원을 빌곤 했다. 모두 그 동네에서 일어난 평범한 날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평범한 날들


어쩌면 내가 애정하고 사랑하는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평범한 날들은 훗날 특별한 선물처럼 간직되는 게 아닐까.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니까 심심한 대화를 해도 행복하고, 매일 먹던 된장찌개도 의미가 생기고, 평범한 하루를 보낼지라도 마음 가득 풍선처럼 따뜻함이 부풀어 오른다.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하는 모든 평범한 '날'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고 의미를 찾아가는 것처럼.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많을수록,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할수록, 평범한 날들도 좋은 기억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게 아닐까? 이런 평범한 장면들을 하나씩 꺼내보면서, 그때의 사랑을 다시 한번 발견하고, 소중히 느끼며 생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날들이여,

오늘도 많은 수고 부탁해.


글 여미

커버 사진 영화 '그녀의 속도'

yeoulhan@nate.com


오늘도 평범한 날을 보내고 계신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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