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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담는 사람

by 여미

남편과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이번 여행을 통해 느낀 건, 무언가를 끝내고 시작하기 전에는 짧든 길든 나만의 의식 같은 것을 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폐업을 하고 하얀색 안경을 샀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빨간색 안경도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만의 의식 같은 것이라고 어딘가에서 인터뷰를 보았는데, 그런 상징을 남겨두는 일이 의미 있고 멋있어 보였다. 나는 하얀색 안경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내겐 여러 개의 안경이 있었지만, 몇 년 전 잃어버린 하얀색 안경을 못 찾았기도 했고, 남편은 내가 하얀색 안경이 더 어울린다고도 했기도 했고, 안경을 사면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는 의미를 넣고 싶기도 했다.


구청에 가서 폐업 신고를 하고, 성수에 가서 안경을 새로 맞췄다. 하얀색 안경을 쓸 때마다, 지난 과거들을 잊고 새로운 '나'로 살아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창작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았다. 쓰고 싶은 말도 없었고 그리고 싶은 그림도 없었다. 그렇게 한 두 번 글을 쓰지 않으니 매일 글을 쓰지 않게 되었고, 이 브런치는 점점 냉동창고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방치되어 있는 블로그를 움직일 수 있는 불씨는 꺼져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폐업을 하고, 자유가 되었고, 여행을 다녀온 뒤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것도 매일매일 무엇이든 쓰기로 했다. 안 쓰는 근육을 움직이게 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글을 잘 쓰든, 이상한 말을 주절주절하든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다고 아직 내 꿈을 찾은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나는 특별한 꿈이 없다. 과거에는 꿈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바구니에 가득 담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냥 단순히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꾸준히 내 생각을 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왜냐면 나도 그런 기록을 훔쳐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남의 글을 계속 읽고 내 생각을 비교해 보고,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가는 이유를 조금이라도 찾고 싶고, 건조했던 나의 하루가 입체적으로 바뀌는 힘을 믿고 있으니까. 여전히 누군가의 진짜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글 여미

커버사진 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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