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 가장 큰 공포는 엄마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었다. 분명 옆에서 엄마랑 같이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눈을 뜨면 엄마가 없었다. 따뜻한 오후 햇살을 받으면서,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겨서 잠에 드는 것이 너무 행복했는데, 몇 시간이 지나고 눈을 뜨면 엄마는 내게 어떤 메모도, 말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곤 했다. 그때부터 나의 공포는 시작되었다. 엄마가 영원히 집에 돌아오지 않을까 봐, 내 곁에 사라질까 봐,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날이, 그날이 바로 오늘일까 봐. 한번 그런 상상을 하니, 엄마가 조금만 자리를 비워도 온몸이 떨리고 불안하고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 종종 울어댔다. 초등학교 때까지 그런 공포를 안고 살았다. 집이 떠나가라 꺼억 꺼억 울어대며 거실에 있는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엄마 핸드폰으로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엄마는 단 한 번도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치고 밤이 되어서야 엄마는 양손 가득 시장에서 봐온 음식 재료들을 들고 나타났다.
그렇게 나타난 엄마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를 보며, 왜 우냐고, 뭐 때문에 그렇게 우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다. 나는 엄마가 너무 소중한데, 엄마를 잃는 상상만 하면 내 세상은, 나의 우주는, 나의 이 하루는 모두가 엉망이 되어버리고 지옥이 되어버리는 건데, 엄마는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엄마가 갑자기 왜 사라져? 그런 걱정하지 마. 이리 와서 밥이나 먹어"
딸이 집에 혼자 남겨질 때마다 이렇게 허구한 날 울어재끼면 차라리 나를 깨워서 같이 시장에 가던가, 아니면 시장이 다녀온다고 메모를 남기던가, 아니면 전화를 받던가, 나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해결책이나 장치는 분명히 많았을 텐데, 엄마는 단 한 가지도 나를 안심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너는 왜 우니?"로 시작해서 "밥이나 먹어"로 끝나는, 요즘 시대 말로 하자면 엄마의 T적 사고방식을 그때 당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서글펐고, 반복되는 엄마의 '사라짐'에 매일매일 공포에 떨었다.
누가 엄마를 잡아간 건 아닐까, 차 사고가 나면 어쩌지, 나는 아직 많이 살아야 하는데 엄마 없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지? 어린 나이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앞으로의 불행을 상상하느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학교 다니느라, 친구를 사귀느라, 학원에 가느랴,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점점 그런 공포에서 멀어졌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끔 그때 내 감정을 떠올리면 상당히 큰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누가 내게 말을 안 해놓고 나를 떠나갈지도 몰라. 오늘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는데 내일은 차갑게 돌아설지도 몰라. 내가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게 끝나버릴지도 몰라."
27년 전에 내가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도 엄마는 건강히 잘 살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고민이 맞을 수도 있지만. 가끔 전화기를 붙잡고 꺼억 꺼억 울어댔던 8살, 9살의 내가 너무 안쓰럽기도 하고, 그때 경험 때문에,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 나오는 불안형 캐릭터처럼, 지금의 내 감정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크게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요즘도 가끔씩 다른 일들로 툭툭 튀어나오는 불안한 감정을 느낄 때면, 한편으로는 대문자 T스러운 엄마를 미워하며 떠올리기도 하지만. 스스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결국 네가 걱정하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지금도 그럴 거니 걱정하지마'
엄마 걱정을 평생 했지만, 엄마는 잘 살고 있다.
'불안'이라는 열차를 탈 때마다 한 번도 밟지도 않았던 브레이크를 이제는 살짝 눌러라도 본다.
괜찮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날 확률도 낮고, 일반적으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조금은 멈춰지는 기분을 느낀다.
글 여미
커버사진 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