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필요한 건 환경과 돈보다는 기한
내가 처음 브런치에 작가 등록을 하고 글을 올린 건 2020년 4월이다. 이때부터 꾸준히 브런치에 글을 쓴 건 아니지만 2022년에는 꽤 많은 글을 업로드했다. 2022년에 쓴 글만 엮어도 책 권은 만들 수 있다. 뚜렷한 목표는 없었지만, 나중에 책을 만들 때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역시 목표가 없으니 완성에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빈티지의 위안>과 <멜버른의 위안>에 이어 다음 책을 출간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책을 만들고 언제 출간할지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애매한 목표와 막연한 계획이 맞물리니 제자리에서 성장은 하지만, 그다음 단계로 진전되진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혼자 해내는 작업이 훨씬 어렵고 힘들다. 기한도 없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 안 해도 그만이지만, 안 하면 본인 스스로 성장할 수가 없다.
그러다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공지를 보게 되었다. 브런치북을 만들어서 응모하면 심사를 통해 몇 명을 선정하여 출판의 기회를 주고 상금을 준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의 글이나 브런치 매거진이 아닌 반드시 브런치북을 만들어야 응모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제까지 브런치에 다양한 주제로 여러 글을 올렸지만, 브런치북을 만들어 볼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비슷한 주제의 글을 한데 모으기 위해 브런치 매거진을 만들긴 했지만 브런치북으로 엮어 하나의 책으로 쓰진 않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브런치북을 한번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를 준비한 기간은 대략 한 달 정도이다. 이제까지 브런치에 올린 글을 묶어서 브런치북으로 만들어도 됐지만, 이왕 마음먹은 거 새로운 주제로 책을 쓰기로 했다.
현재까지 내가 공식적으로 출간한 책은 총 두 권밖에 안 되지만 나에게는 큰 목표가 있다. <빈티지의 위안>과 <멜버른의 위안>에 이어 8개의 책을 더 출간하여 위안 시리즈 10권을 만드는 게 나의 야심 찬 계획이다. 그래서 다음 책에는 어떤 위안을 주제로 삼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요즘 꽂힌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여행을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조금 귀찮은 사람은 있겠지만 미친 듯이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많이 다녔다. 여행에서 이전에 해보지 못한 경험으로 새로운 감정을 배우고 이를 통해 성장하고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한다. 나의 여행 이야기를 책에 담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현재 호주에서 살고 있다. 2021년에 한국에 1년 동안 머물면서 가족, 친구 때론 혼자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다. 아직도 그때의 좋았던 추억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는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잊히기 마련이다.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때 글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의 제목은 <여행의 위안, 국내편>이다. 먼저 목차를 세우고 나니 총 15개였다. 10월 한 달 동안 과연 15개의 목차를 완성할 수 있을까. 일단 해보고 안 되면 포기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하였다. 포기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건 일단 시작하기 위해 나를 자극하고 재촉하는 멘트이다.
가끔 작업하다 보면 환경과 자금을 핑계 삼을 때가 있다. 그렇지만 정말 나에게 필요한 건 기한이라고 생각한다.
프로젝트의 마감은 10월 23일이었다. 10월 둘째 주쯤 확인해 보니 이제까지 쓴 글이 대략 5개였고 심지어 미완성이었다. 15개 목차를 완성할 생각을 하니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나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10월 15일에 갑자기 카카오 서버가 마비되었다. 이 사태로 카카오와 관련된 모든 서비스에 오류가 생겼고 브런치도 접속이 불가능했다.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으며 복구하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버 마비로 인해 브런치에 접속하지 못 한 사람이 많기에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는 일주일 연장되었다.
어떻게 보면 나에겐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10월 마지막 주에는 하루에 2~3편의 글을 업로드하며 13개의 목차를 완성하였다. 초반에 계획했던 15개 목차는 아니었지만 13편으로 구성된 나의 첫 브런치북인 <여행의 위안, 국내편>이 완성되었다. 10월 30일 마감 2시간을 남기고 나는 프로젝트에 가까스로 응모하였다.
내가 처음에 계획한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13편으로 구성된 브런치북을 완성했다는 것 자체에 뿌듯함을 느꼈다. 이번 프로젝트가 아니었으면 아마 이 책은 영원히 탄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프리랜서로 살다 보니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평생 졸업과제를 하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졸업과제는 교수님의 피드백과 제출 기한이라도 있는데 프리랜서의 삶은 모든 걸 혼자 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외주 업무 할 때가 마음이 한결 편하다. 정해진 일과 기한이 있고 클라이언트에게 피드백도 받는다. 오로지 혼자 해내는 작업이 훨씬 어렵고 힘들다. 기한도 없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 안 해도 그만이지만, 안 하면 본인 스스로 성장할 수가 없다.
2022년 하반기를 흘려보내며 마무리하는 끝 무렵, 브런치 프로젝트를 통해 나의 하반기 결산 리스트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행의 위안, 국내편>은 아직 미흡하고 정리가 안 된 부분이 있다. 하나의 책으로 만들었지만, 브런치에서 글 하나만 보는 사람도 있기에 목차마다 중복된 내용도 있다. 그래서 나중에 종이책으로 만들게 된다면 빠뜨렸던 목차도 추가하고 전체적으로 수정을 해야 한다. 그래도 어찌 됐든 이렇게 나의 첫 브런치북이 탄생하게 되었다.
가끔 나는 작업하다 보면 환경과 자금을 핑계 삼을 때가 있다. 그렇지만 정말 나에게 필요한 건 기한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정한 기한을 지키기 어렵다면 공모전이든 뭐라도 해보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그냥 시작이라도 해보자. 어떤 결과물과 과정이 나올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여울(Yeouul)
<빈티지의 위안>, <멜버른의 위안>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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