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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Jan 12. 2021

꽃에는 힘이 있다

도대체 어떤 힘이 있길래 이렇게 나를 끌어당기는 걸까?


우울증이 절정기에 치달았을 때 엄마가 꽃을 사준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고 소박한 들꽃 종류의 것으로, 한줌 사다가 투명한 유리병에 꽂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그것을 식탁에 두고서 종종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이상하게 그 주위의 공기는 다른 곳과 비교하여 채도가 높은 느낌이었다. 싸늘하게 배회하는 공기가 꽃과 맞닿아 몽글몽글 구름처럼 둥그러지는 느낌. 그래서였나. 들꽃 향이 나는 작고 하얀 꽃잎들을 보고 있노라면, 비포장도로처럼 들쭉날쭉 했던 마음이 한결 평평해졌다.      


일주일 뒤 엄마는 국화 한 다발을 다시 내게 주었다. 나는 그것을 화병에 정갈히 꽂아 매일 물을 갈아주고 볕을 쫴주었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나는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황폐해진 마음이 잠시 동안 가만가만해질 수 있도록.      

 


그 후로 나는 2주에 한 번 직접 꽃을 사러간다. 좋아하는 꽃집에 들러 그날 예뻐 보이는 것을 만원에서 만 오천 원 어치, 딱 한줌 정도만. 식비나 난방비는 그토록 아끼면서 정작 아무 실용성이라곤 없는 꽃은 정기적으로 산다니. ‘도대체 꽃에는 어떤 힘이 있길래 이렇게 나를 끌어당기는 걸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는 한 가지 풍경이 있었다. 나는 그날의 한강을 떠올렸다.      


비슷한 시기, 서울에 사는 언니는 우울증이 점점 더 심해져가는 나를 혼자 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잠깐이라도 서울에 올라와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했다(그때는 수도권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되기 전이었다). 처음에는 싫다고 거절했으나 실행력이 불도저 급인 언니는 서울행 비행기 표를 끊어 내게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건 무를 수 없다고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결국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는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고, 2박3일을 언니와 함께 보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후로 신기하리라만치 내 상태는 호전되었다. 전에는 하루 중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는데, 제 시간에 끼니를 챙겨먹으려고 노력했고 집을 청소하려 몸을 꿈질거렸다. 짧게나마 책을 읽기도 했다. 아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어서, 그리고 언제든 내편에 되어줄 존재가 그 자리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였기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역시 그날의 한강도 단단히 제몫을 했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 언니와 나는 한강에 갔다. 두툼한 담요와 핫팩, 커피가 담긴 보온병과 전날 사둔 마들렌 빵, 그리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챙겼다. 편의점에서 라면 하나를 끓여, 한강이 보이는 단상에 자리를 잡았다. 햇볕에 반사된 반짝이는 윤슬이 한강의 넓은 수면을 가득 메웠고, 수평선 위로는 해가 따스한 빛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따금씩 빛줄기 사이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겹쳤다.      


우리는 이마에 닿는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담요를 덮은 채 뜨거운 라면을 나눠먹고, 식은 커피와 마들렌을 조금씩 떼어먹었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선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왔다. 오후 3시의 한강을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두 눈에 찬찬히 담았다. 눈이 시릴 것만 같은 그 풍경을 가만 쳐다보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시야가 순식간에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 장면을, 이 순간의 느낌을 오감으로 간직하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다시 눈을 천천히 떴다. ‘더할 나위 없구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오롯한 자연의 모습은 폐허 된 나의 마음속에 무언가를 가득 채워주었다. 거칠고 모난 부분을 둥글게 덮는 동시에 어떤 충만함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것의 정체는 부드러운 위로와 단단한 생명력이었다. 말하자면, ‘살아갈 힘’을.      


네덜란드 헤이그 바닷가


나는 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 있다. 대학생이었을 적 네덜란드로 교환학생으로 갔는데, 그때 헤이그 바닷가에서 느꼈던 그것과 같다.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와 손에 잡힐 듯 낮게 떠다니는 크로와상을 닮은 구름, 수면위로 찬란히 내린 햇살, 얼굴을 기분 좋게 스치는 산들바람까지. 나는 물에 발을 담그고 눈을 감은 채 진심으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모순적이게도, 나는 그때 분명 살아갈 힘을 얻었다. 이 힘겨운 세상을 버텨나갈 힘을.     





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 사람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 장면은 때로는 자연이었다가 때로는 사람이 되었다가 한다

                                                                          _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 중에서


꽃은, 내가 마주했던 그 거대한 자연의 생명력을 한아름 떼어다가 나의 공간에 놓아둔 것이다. 나는 매일 밥을 먹고 책을 읽을 때, 오늘처럼 글을 쓸 때마다 눈앞의 꽃을 보며 몽글한 위로와 살아갈 힘을 조금씩 얻는다. 뿌리에서 흡수한 물이 줄기로 전해지고, 다시 봉오리에 도달해 기어코 잎을 열어내는, 그 작고 신묘한 생명력을 나는 한 잎 한 잎 떼어다가 오늘을 버틸 연료로 사용한다.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낼 힘을. 그게 바로 꽃이 가진 선한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보통 누군가를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꽃을 선물하고는 하지. 보는 것만으로도 화사하고 아름다우니 축하하는 자리에 꽃만큼 제격인 것도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꽃이 가진 힘을 알고서부턴 누군가를 위로할 때, 힘이 되어주고플 때 꽃을 선물한다. 이 아이가 자신이 가진 생명력을 조금씩 떼어다가 당신에게 위로와 활기를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그러니, 부디 씩씩하게 이 힘겨운 상황을 무사히 건너가라고.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살아내라고.     


물론, 나에게도 잊지 않고 2주에 한번 선물해준다.

2주 동안 잘 버텨냈어, 굿 잡. 그럼 다음 2주도 이 꽃과 함께 힘을 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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