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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목적을 외면하면서 걸어야 하는 이유

by 김예란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이었을 것이다. 빗줄기가 거세게 땅에 부딪쳐 아스팔트 전체가 지글지글 끓는 듯한 날. 나는 우산을 한 손에 쥐고 등에 가방을 맨 채 부지런히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걷고 걸어도 저어기 멀리 떨어진 목적지는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신발과 바지자락은 이미 물에 젖은 지 오래고, 우산을 든 손에서는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젠장. 내가 왜 택시를 안탔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줄곧 앞만 보고 있던 눈을 내리깔아 바닥을 보았다. 이제 앞을 바라볼 힘도 없다. 그저 오른발, 왼발이 나아가는 모습에만 집중한 채 생각을 비우고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어느 순간 딱, 고개를 들었는데, 어머나. 어느새 목적지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yes! 이 고행이 끝난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아, 때로는 목적을 외면한 채 걸어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하는 것을.


오직 목표를 바라보며 달리라는 말을 많이들 하지. 그런데 그거 알아? 매순간 목표를 의식하며 달린다는 것은, 곧 끊임없이 나의 현재 상태를 자각하는 일이라는 걸. 내가 바라는 곳에 초점을 맞춰놓으면 거기에 닿기 위해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이 어디쯤인지 항상 가늠해야 하니까. 그런데 그러다보면 발생하는 몇 가지 부작용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비관’이다.


내가 바라는 곳은 저어 멀리 있는데, 왜 나는 아직도 이것밖에 안될까. 분명 이렇게 열심히 걸었으면 이제 목적지에 도달 할만도 한데, 내가 노력한 거에 대한 보상을 받을 만도 한데 왜 나는 아직도 이곳에서 이것밖에. 분명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자리를 지지부진하게 맴도는 것만 같고, 그런 생각은 곧 좌절과 자괴로 이어지기 쉽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커질수록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니까. 지금 내 상태도, 그냥 나라는 사람 자체도, 다 마음에 들지 않게 되니까.


그리하여 스스로의 능력과 선택에 의심을 품게 되는 경지까지 온다. 과거의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옳았을까. 어쩌면 나는 여기 한포기의 재능도 없는 게 아닐까.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아볼까. 내가 걸어온 길을 회의와 번민의 눈으로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결국엔 우리를 빨리 지치게 한다. 이 경기가 장기전임을 망각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나 결과가 없는 것 같아 두 발을 멈추고 싶어진다. 목적지가 너무도 멀고 높게 느껴져 더 이상 발을 뗄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마치 그날의 빗속에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분명 쉬지 않고 걷고 있는데. 어쩐지 목적지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우리에겐 때로는 목적지를 부러 외면하고 자신의 두발만 쳐다보며 걸을 필요가 있다. 무언가 ‘되는’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다만 ‘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 오른발 왼발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걷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


예를 들어볼까. 나의 경우엔 브런치가 그랬다. 처음에 브런치를 시작할 때 구독자 300명, 글 100편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글을 쓰고 한편 한편마다 최선의 정성을 들여도 구독자가 30명 언저리에서 더는 늘지 않을 때가 있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아무도 읽지 않을 텐데 왜 이렇게까지 열심일까, 좌절과 회의와 번민이 물밀 듯 머리와 마음에 들어찼다. 구독자 300명은 무슨, 아무도 내 글 같은 건 읽지 않아.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될까. 나는 여기에 아무 재능이 없는 그저 그런 시시한 사람인데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미래의 나에게 더없이 미안했다. 과거의 내가 이렇게 한심해서 아무 결과도 성과도 없는 일에 목을 맨다고. 그래서 미래의 나에게 안겨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글은 쓰는 건 나의 포기할 수 없는 정체성의 일부였고 작가가 되는 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나의 간절하고 간절한 오랜 꿈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구독자와 좋아요 같은 것에 신경 쓰는 것을. 그리고는 오직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고 일주일에 한편씩 글을 발행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 반응이 있든 없든 보답을 받든 말든 나는 정해진 시간과 날짜에 한편의 글을 발행한다. 그러기 위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기 전 주어진 시간에 그저 쓸 뿐이다. 그렇게 목표가 아닌 ‘쓰는 행위’, 그것에만 집중한 채 묵묵히 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벌써 목표치의 반이나 달성해있었다. 발행한 글은 50편이 넘었고 구독자수는 얼추 150명가량이 되었다. 내 글을 책으로 내고 싶다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나는 그중 한 곳과 출간계약을 하게 되었다. 9월 중순쯤에는 나의 첫 책이 나온다. 나의 오른발 왼발이 나아가는 모양새에만 집중한 채 뚜벅뚜벅 계속 걸었더니 벌써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 역시 멈추지 않길 잘했다.


‘되다’와 ‘하다’를 혼동하지 않으면 70점짜리 재능은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였다. 그러니 좋아하는 일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건 성공 여부가 아닐지 모른다. 되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하고 싶어서인가 하는 것.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은 되려는 욕심이지
좋아하는 일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신지 작가의 에세이 <평일도 인생이니까>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그리하여, 나는 여전히 ‘되고’싶지만 일단은 ‘하다’에 초점을 맞추어 놓기로 했다. 지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오래오래 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은 되려는 욕심이지 좋아하는 일 자체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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