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가장 행복하고 슬펐던 10주
첫 번째 이별
고통스러웠던 며칠이 지났다.
사실 나는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울고 아직도 괜찮지 않다.
앞으로 괜찮아질 자신도 없다.
상처로 얼룩진 마음의 흉터들이 당장의 수술의 고통보다 더 깊게 파여있다.
9월, 선물처럼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온 새싹이는 10주 차에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다.
9주가 지나면 유산위험은 줄어든댔는데..
9주도 무사히 지났고 불과 6일 전까지 심장소리를 들었는데..
내가 일을 해서인가, 왜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지, 일주일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기는 무사할까...
여러 생각들로 며칠을 자책하고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임신을 하기 전 옆에 친구와 남편이 있어도 늘 우울에 빠져있던 내게 갑자기 찾아온 아기는 처음으로 미래를 꿈꾸게 해 주는 존재였다.
당장 내일도 살기 싫은 날이 대부분이었는데, 아기가 생기고 나서는 무사히 태어날 미래를 그리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아기용품들도 꽤 많이 주문했었다.
유산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해줬지만 지금도 아무런 말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누구의 위로를 들어도 그 위로들이 거듭될수록 내겐
"아기를 잃은 슬픔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뻔한 위로를 하는 거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걱정 많은 초산모라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을 가면서 모든 불안들이 아기 심장소리를 들으면 눈 녹듯 사라졌었다.
내게 갑자기 찾아온 새싹이는 늘 혼자였던 내게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하지만 내겐 이제 아무것도 없다.
수술을 하고 초음파에서 아기는 없고 고인 피로 얼룩진 초음파를 봤을 때 이제 더 흘릴 눈물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끝없이 공허했다.
8주 차에 태아보험도 들고 아기 신발도 사고 아기옷이랑 초음파앨범, 산후조리원도 기쁜 마음으로 예약했었다.
10주 차에 생각지도 못한 유산으로 이 모든 걸 취소하고 정리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울먹울먹 하면서 보험사에 전화해서 유산해서 태아보험 해지한다고 할 때도 너무 힘들었다.
초기라 많이 알리진 않았지만 주변에 유산을 말할 때도,
아기와 관련된 것들을 취소할 때마다 내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게 너무 큰 고통이었다.
유산사실을 알고온날 집엔 하이베베가 배송되어 있었다. 병원 가기 전날 10주부턴 하이베베를 하면 태아심장소리가 들린대서 설레는 마음으로 하이베베도 구매했던 건데..
그 순간에도 내 아기는 심장이 멈춰있었다.
남편은 하이베베도 반품시키고 아기 옷과 신발도 버리자고 했다.
알겠다 말하고선 남편 몰래 큰 상자에 아기용품을 담아 옷장 깊숙이 숨겨놓고 옷장을 열지 못한다. 상자만 봐도 마음 한편이 저릿하다.
그날은 매주 병원을 갈 때와 다르지 않았다.
10주 차.. 평소와 다름없이 병원을 가 진료를 보는데 내가 봐도 초음파가 이상했다. 아기의 팔다리도보이고 이전보다 좀 큰 것 같은데 내가 봐도 반짝여야 할 심장이 보이지 않았다.
아기가 웅크린 채 미동도 없었다.
초음파를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된 걸 알았다.
의사는 같은 병원의 다른 의사에게도 봐달라고 했고 그 의사도 잘못된 게 맞다고 했다. 한없이 울며 누워있는 나를 진찰하러 진료실에 들어오면서 "10주엔 유산이 잘 안 되는데.." 중얼거렸던 게 계속 기억에 남는다..
나도 10주엔 유산이 안될 줄 알았다.
방심해서일까, 당장 두 달 뒤의 결혼준비를 하면서도 아기한테 무리가 될까 봐 결혼식을 한 달 남겨둔 시점까지 혹시나 하는 상황 때문에 안정기에 들어서고 웨딩사진을 찍으려고 스튜디오촬영도 아기가 12주에 접어들던 주에 예약했었다.
근데 정말 왜 하필 지금 떠났어야 했던 걸까..
눈물밖에 나지 않았고 병원에서는 바로 수술을 해야 하니 남편을 데려오랬다.
한 시간 거리에서 일하는 남편은 소식을 듣자마자 반차를 쓰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난 그 순간에도 믿기지 않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운전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한없이 울면서 산부인과들을 전전하며 초음파를 봐달라고 했다.
두 군데 더 가본 병원에서도 대답은 같았다. 아기가 2-3일 전에 잘못된 게 맞다.. 수술을 해야 한다..
병원들에서는 초음파사진을 주지 않았다.
세 번째로 간 곳에서 초음파 사진을 달라는 내게 안된다고 하다가 애원하며 우는 내 모습을 보고 마지못해 초음파사진을 건넸다.
한참을 초음파 사진을 쥐고 남편이 올 때까지 울었다.
남편이 오고 원래 다니던 병원 주치의의 초음파를 마지막으로 아기가 잘못된 게 맞다는 게 와닿았다.
남편은 차마 아기의 마지막 초음파를 보지 못했다.
적막만 가득한 산부인과에서 그날 여섯 번째로 마지막 초음파를 볼 때는 눈물도 안 났다.
소파술 예약을 위해 직장에 얘기했는데 3일 뒤에 쉬는 날이니 그때 수술을 하랬다.
나는 당장 죽은 아기가 뱃속에 있는 게 너무 힘든데..
그 후 이틀은 잠도 못 자고 밤새 울고서는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일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하는 내내 뱃속에 죽은 아기가 있다는 생각에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먹지 않았다.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았고 먹고 싶지 않았다.
이틀을 잠도 안 자고 일하며 눈물로 지내서인지 서서히 열도 나기 시작했다.
이제야 내 몸도 아기가 잘못된 걸 알고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틀째 일하던 날 오후, 까맣게 흘러나온 피를 보고 정말 무너져 내렸다.
도저히 안될 것 같아 그날 네시에 퇴근하자마자 다음날이었던 수술을 당겨하자고 했다.
급하게 배우자 유산휴가를 받은 남편도 우는 나를 데리러 직장 앞으로 와 내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원에 가줬다.
가면서 우리는 주문처럼 계속 되뇌었다.
"괜찮을 거야.. 우리는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마지막으로 아기가 머물러있는 배를 잡고 창밖을 보는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그날처럼 병원에 가기 싫고 무서운 날은 없었다.
수술의 기억은 정말 끔찍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니 차가운 기운이 몸을 감싸고돌았다.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굵은 바늘을 꽂고 난 이내 잠들었지만
깨고 난 후 너무 춥고 고통스러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마취에서 깨고 나니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르며 침대를 굴러다녔고 어느새 남편이 옆에 서서 달래주고 있었지만 남편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수술이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며 너무 아프다고 소리만 질렀다. 며칠을 금식했지만 마취제 때문인지 갑자기 토할 것 같아서 봉지를 부여잡고 위액만 내뱉었다.
사이드레일을 올리고 있었지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굴러다니면서 타 넘을뻔해서 남편이 날 잡고 가만히 있으랬다.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이내 진통제를 더 맞은 후 죽을 것 같던 통증이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병동으로 올라왔다.
마취제 때문에 비몽사몽 한 와중에 저녁시간이라고 내 자리엔 미역국이 있었다.
미역국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는 아기도 없는데.. 미역국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근데 나보다 더 지쳐 보이는 남편이 "네가 자꾸 밥도 안 먹고 힘들어하면 새싹이 도 미안할 거야. 우리 새싹이 이제 잘 가라고 보내주고 곧 다시 만나자" 이렇게 얘기했다. 뭐라고 더 얘기하면서 달래줬는데 이 말만 기억난다.
그렇게 얘기하는 남편을 올려다보는데 상처 가득한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도 상실감이 나만큼이나 컸을 텐데 나는 내 상처만 강요했구나 싶어서 너무 미안했다.
내 세상은 끝난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내게 남편이 있구나 싶어서 그 순간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미역국을 먹고 이내 잠들었다.
1인실이었지만 내 병실 말고 다른 병실은 거의 다 산모들 뿐인 데다가 내 병실 옆은 산후조리원이어서 나는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퇴원할 때도 죄지은 사람처럼 위축돼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산모들과 아기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힘들었다. 지쳐도 행복해 보이는 산모들 사이에서 나는... 너무 비참했다.
수술을 하고 나니 배가 아픈 것보다 온몸의 힘이 빠져 영양제와 유착방지주사를 맞고 하루종일 수액만 달고 있다가 다음날 퇴원했다.
퇴원하기 전 수술 경과를 보기 위해 초음파를 봤는데....
늘 있던 자리에 아기와 아기집이 사라져 있고 까만 피들이 있는 것만 보였다.
정말 없구나.. 떠났구나.. 울지도 않고 다 포기하고 멍하니 초음파를 봤다.
몰랐는데 내게서 꺼내진 아기는 조직검사를 하기 위해 보내졌고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온다고 했다. 이전에 어떤 블로그에서 계류유산 후 검사를 한다는 걸 본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이번일이 아기문제여도, 내문제여도 둘 다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검사하겠다 얘기하지 않았었다.
결과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 계속 다음임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리 잡을 것 같아서..
아기를 보내준 지금도 이미 나와있을 조직검사결과가 그 무엇보다 무섭다.
집에 와서 남편과 나 둘 다 너무 지친 나머지 잠에 들었다가 눈뜨자마자 그새 또 눈물바람인 나를 데리고 바람 쐬러 가자며 드라이브 삼아 근처의 강을 산책하러 갔다.
강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가 엄청 많았다.
새싹이 태몽이 까마귀가 내 품에 뛰어들어 파닥거리는 거였는데.. 태몽에서처럼 큰 까마귀가 내 앞에 앉았다가 멀리 날아가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남편과 걸으면서 속으로 까마귀에게 잘 가라고 인사했다.
어쩐지 마음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았다.
까마귀는 높게 날아 그렇게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 수술 이틀째에도 검사를 받으러 오라고 했었기에 병원을 찾았다. 주말이라 사람이 정말 많았고 평소처럼 간호사는 "000 산모님-"하고 내 이름을 불러 혈압, 몸무게를 재랬다. 순간 눈물이 나서 유산 후에도 다 그대로 하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차트를 확인하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젊으니까 금방 다시 아기를 가질 거라는 뻔한 위로를 뒤로하고 나는 진료실 앞에 대기하면서 또 울었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산모들이 너무 많았다. 내 주치의 방에서 나오는 산모들은 모두 웃으면서 초음파사진을 들고 나왔고, 중간에 아기를 안은 부모들 두 명이 주치의에게 인사도 하러 왔다.
밖으로 나와 아기를 보며 웃고 있는 주치의와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아기를 안은 부모를 보는데 너무 비참했다.
그 와중에 그 아기의 겉싸개가 내가 미리 사놓은 겉싸개와 똑같아서 그걸 보고 무너져버렸다.
한참을 귀를 막고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예약을 했음에도 한 시간 넘게 기다리는 그 시간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그저 하염없이 울었다.
한 시간이 넘어가는 시점에는 숨도 막혀오고 공황증상처럼 앞이 하얬다. 도저히 그곳에 있지 못할 것 같아서 옆에서 같이 힘들어하는 남편의 손을 이끌고 도저히 안 되겠다고 진료 보지 말자고, 나가자고 했다.
그래도 진료는 봐야 한다며 나를 달래는 남편의 손을 잡고 그때부터는 그냥 체념하고 눈물만 흘렸다.
대기는 한 시간 반이었는데 진료는 1분도 되지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질초음파로 또다시 텅 빈 자궁을 보고 수술은 잘됬다고, 일주일 후에 예약해 놓을 테니 예후를 보자는 말을 끝으로 내 진료는 빠르게 끝났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곳에서 나는 죄인인 것 같아서, 빨리 나가고 싶어서 질초음파를 보자마자 속옷을 입고 도망치듯 나오다가
순간 머릿속에 일주일 후가 근무인 게 떠올라 전날로 바꾼다고 말하려는데 내 마음과는 다르게 갑자기 눈물이 또 났다.
"목요일.. 퇴근하면 네시니까 네시에..."까지 얘기하고 오열을 하며 진료실을 나왔다.
사람들이 모두 날 쳐다보는 게 느껴져서 더 비참했다.
남편도 남겨두고 병원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병원밖에 주저앉아 울었다.
뒤늦게 계산을 하고 온 남편도 날 보자마자 울었다.
이제 울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하면서 휴지를 건네는 남편의 눈도 빨갰다.
그렇게 우리는 병원 앞에서 한참을 같이 울었다.
도저히 그대로 집에 못 갈 것 같아 우리는 떠난 아기 초라도 피워주고 오자며 그 길로 두 시간 거리의 낙산사로 향했다.
가는 길에도 울면서 낙산사에 다녀오면 정말 보내주자고, 이제 울지 말자고 약속했다.
낙산사는 마치 봄같이 따뜻했다.
우리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정말.. 포근했다.
그렇게 우리는 해수관음상의 옆에 초를 세워두고 돌아왔다.
여전히 열도 있고 몸은 안 좋았지만 낙산사를 오를수록 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싹이에게 엄마아빠가 미안하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기를 좋은 곳에 데려가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꼭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도 빌었다.
나는 이번 임신을 하기 이전엔 아기를 낳을 생각도 없고 엄마가 될 자신도 없었는데.. 한 번 가져보고 나니 정말 아기가 간절해졌다.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을 때는 모를 감정들을 겪고 나니
나도 아기와 행복해지고 싶었다.
심장소리를 듣고, 작은 동그라미였다가 서서히 커지며 3cm 남짓한 작은 생명체가 머리와 팔다리 형태로 변해가는 것도 신기하고 좋았고-
무엇보다도 뱃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든든했다.
혼자여도 난 늘 혼자가 아닌 기분으로 행복했다.
10주 동안 인생에서 제일 행복하고 제일 불행한 시간을 겪고 난 후.. 그래도 더 건강한 애기 만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지금은 많이 울진 않는다.
그래도 애기가 있던 시간 동안은 정말 행복했어서 새싹이 가 내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남겨주고 간 것도 고맙다.
이번 임신을 겪으면서 우리 부부와 양가어른들을 포함한 모든 가족들이 겪었던 임신이 주는 행복과 유산으로 인한 상실감이 너무 커서 불과 10주 전 아기 생각은 없던 우리는 바로 다음 임신을 준비하기로 했다.
운동도 하고 좋은 것만 먹고..
아기가 다시 찾아오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정말 많이 사랑했고 행복했어.
아직 모든 게 서툴렀던 우리에게 와줘서 고마워.
다시 만날 때까지 더 많이 노력할게,
꼭 우리에게 다시 와 줘.
우리의 첫째 새싹아, 영원히 널 잊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