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나와 살아간다는 것
내가 외면한 가면속의 나
나는 천성이 좀 우울한 사람이다.
늘 나 혼자만의 우울에 사로잡혀서 파고들었다.
내 상황은 누가 봐도 딱히 우울할 이유는 없었지만 거의 늘 우울한 상태였다.
이유 없는 우울과 늘 함께 살아가다가 성인이 되어 처음 MBTI가 나왔을 때
내 MBTI 가 희귀한 infj인 걸 보고 그 심오한 특징들을 보며 내 우울에도 이유가 있었다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긴 했지만,
꼭 infj여서 가 아니더라도 평소에도 내가 우울한 게 당연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끔 행복 속에 있는 게 낯설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나는 늘 우울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나 힘든 아이'였다.
아기 때는 너무 자주 울어서 엄마가 나 때문에 산후우울증에 걸렸다고 했다.
품 안에서 잠깐 떼 놓아도 악을 써서 한 시도 떼놓을 수 없었다고.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게 내 아기 때 사진을 보면 누구에게 항상 업혀있거나 안겨있다.
아기 때인데도 곧 울 것 같은 얼굴들의 사진만 잔뜩, 웃는 사진은 내가 봐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래도 어린 나는 복이 많았다.
울 때마다 안아주고 달래줄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엄마는 나를 키우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이듬해에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다행히 동생은 나와 반대로 있는 듯 없는 듯 너무 조용하고 얌전한 아기였다고 했다.
다만 내가 질투에 사로잡혔던 건지 원래보다 더 징징거리고 떼써서 동생에게 쓸 에너지를 나한테 다 쏟아부었다고.
나는 동생보다도 더 엄마에게 자주 안겨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런데도 동생은 얌전하게 잘 자랐다.
내가 배려해야 할 존재라는 걸 어린 동생도 받아들였던 걸까?
그 후에도 남동생은 엄마 아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이 내게 들어도 엇나가는 일 없이 잘 자랐다.
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해도 떼쓰고 엇나가는 건 나였다.
모든 면에서 나는 우리 가족에게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조금 커서는 사춘기에 지독하게 시달려서 우울을 넘어서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당연히 그때도, 누가 봐도 내 상황은 힘들 게 없었다.
여행을 가서도 혼자 갑자기 뛰쳐나가 밤거리를 헤맨다거나 가족여행으로 해외여행을 가서도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몇 시간씩 말도 없이 없어져서 가족들의 속을 끓이게 만들었다.
항상 상황을 꼬는 재능이 있었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나는 나 자체로 좀 많이 힘든 애였다.
항상 힘들었고 항상 죽고 싶었고 여행을 떠나서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조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힘들었고 지금도 그때의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나로 사는 건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나는 어느 순간부턴 나를 숨긴 채 잘 사는 다른 사람을 따라 살았다.
나로 살았던 흔적을 지우려고 끝없이 노력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적당히 잘 사는 누군가처럼 살아가야 했다.
나로 산다면 얼마 못 가 죽어버릴 게 분명했다.
아무리 찾아도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뭘 해도 죽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했다.
그때부터 다른 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적당히 잘 사는 누군가처럼 되기 위해 공부도 했고
적당히 잘 사는 사람처럼 웃고 살았다.
적당한 가면을 잘 골라 쓴 탓에 사람들은 다행히 가면을 쓴 내게서 어둠은 보지 못했다.
가면을 쓰고 열심히 웃고 산 탓에
사람들은 나를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지금도 나를 만나는 사람은 내가 마냥 밝은 사람인 줄 안다.
늘 웃고 있어서 해맑다고.
그건 내가 아닌데- 싶어서 지금도 그 말을 들으면 그게 날 지칭하는 게 맞는지 이질적이다.
가면을 쓰고 사는 건 어떻게 보면 너무 편했다.
나는 가면을 쓰고 살기 위해 적당히 잘 사는 직업을 선택했고 적당한 시기에 적당히 괜찮은 남편을 만났다.
그제서야 드디어 적당히 잘 사는 사람처럼 된 것 같았다.
내가 원해서 쓴 가면이 내가 된 것 같아서 안도했다.
평화가 이어지던 중 가면 속의 우울한 내가 나타난 건 찰나였다.
적당한 가면을 쓰고 살던 내가 내 안의 나를 수면 위로 끄집어 내기 시작한 건 드디어 내가 가면의 내가 되었다 믿었던 시기여서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내가 원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 삼 교대를 하며 바쁘게 살았기 때문에 몰랐던 걸까,
결혼과 동시에 퇴사를 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로 오며 남편은 집에 잘 들어오질 않아 멍하니 벽만 보고 사는 일상이 몇 달 계속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늘 바쁘게 살던 내 시간이 멈춰버렸다.
설상가상 그즈음 엔 유산도 겪었고 수술 이후에 한 번씩 그때의 슬픔이 치밀어올라 혼자 우는 날이 늘었다.
남편이 집에 잘 못 들어온다는 것만 빼면 남편과 크게 싸운다거나 부딪힌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남편에게 이 시골로 와서 망가졌다 악을 쓰며 따지는 나를 발견했다.
다시 또, 어렸을 때 내 모습 그대로 돌아온 거다.
내가 외면했던 나로.
모든 게 한순간에 틀어졌다.
그동안의 내가 만든 나는 허상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
우울 속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결국 나는 나였다.
'돌고 돌아 또다시 만났네-아무리 숨겨도 내가 네가 외면했던 너야.'
우울이 내게 인사하는 듯했다.
그렇게 본래의 나는 가면 위의 나를 생각보다 빠르게 집어삼켰고 나는 무기력하게 우울의 소용돌이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지금의 내 삶은 그때의 내가 그랬듯 누군가의 눈에는 행복한 삶이었다.
상황은 바뀐 게 없었지만
갑자기 치고 올라온 가면 속의 나를 만난 이후엔 웃는 법도 잊었다.
시골에선 사람을 만날 일에 없기도 했고 어쩌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날지라도 더 이상 예쁘게 웃지 않았다.
다시 가면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다 망가져버린 마음을 안고 행복하단 거짓된 가면을 쓰는 게 더 괴로웠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고통의 한가운데,
다 불타 재밖에 남지 않은 황량한 곳의 한가운데였다.
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 다시 시작된 우울에 또다시 나도, 남편도 그때의 우리 부모님과 같은 긴 싸움을 하고 있다.
한 번씩 이유 없이 밤새도록 우는 날도 최근 잦아졌다.
우울한 나와 산다는 건 참 힘들다.
나도 내가 힘든데 남편은 얼마나 힘들까 싶다.
남편도 끝없는 내 우울을 전부 이해하진 못해 한 번씩 도대체 왜 그렇게 힘든 거냐 묻곤 했지만 나도 이유를 몰라서 답할 수 없었다.
때문에 굳이 이해하지 않더라도 남편은 요즘 내가 어둠에 빠진다 싶으면 그저 기다려주고 본인의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려 한다.
요즘의 남편은 나를 데리고 평소에 늦은 퇴근 후에도 여기저기 산책이라도 같이 하러 가고,
근방의 도시로 날 데리고 나가 내가 좋아하는 예쁜 카페를 먼저 찾아 데리고 간다.
내가 요즘 여행을 더 많이 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
떠나있다 보면 잠깐은 나아진다.
나도, 나를 우울 속에서 끄집어 내기 위해 남편이 없는 낮에는 혼자서 좋아하는 예쁜 카페를 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돗자리 하나 들고 밖으로 나가 텅 빈 시골의 공원에서 몇 시간씩 누워있곤 한다.
자연 속에서 같이 숨 쉬다 보면 그 순간은 괜찮은 내가 된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면 잠깐은 이곳에서 이대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나를 나아지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사실은 점점 지친다.
그때 쏟아부었던 시간만큼의 노력을 하고 싶지도 않고,
또 다른 가면을 찾아 쓸 여력도 없다.
이 모습도 내 모습인 걸 받아들여야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사춘기처럼 다시 찾아온 우울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울한 나와 산다는 거.. 정말 지치고 힘든 일이다.
앞으로 이런 불안한 나와 살아가기 위해 많은 산을 넘어야겠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내일을 살아갈 거다.
어떤 날들은 살아있는 게 너무 싫다가도,
따사로운 햇볕이 비추는 어느 날은 살아있기라도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불안정한 내 곁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한 나를 떠나지 않고 있어주는 내 사람들에게 오늘도 끝없이 감사하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