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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더러운 날 (초단편소설)

by 화이트커피

주인공의 시점이 다르므로 운수없는 날부터 시작할까요?^^



늦가을, 짧아진 하루의 오후 한 시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 채영이와 강남역에서 약속이 잡혔다. 계속 미루어왔는데 드디어 오늘에서야 만나게 되었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유동인구가 다니는 역답게 사람들이 겁나게 오고 간다.


지난번 채영이가 꼼꼼하게 알아보고 찾아낸 파스타 맛집에서 보기로 했다. 요즘 뇨끼가 완전 대세인데 이곳은 옥수수가 포인트가 되고 감자소스와 감자를 으깨서 치즈볼처럼 만든 것이 대박인 집이다. 여기에 감자칩이 곁들여 고소한 맛의 조화가 끝내준다. 또한, 빠질 수 없는 화이트 라구 파스타는 고기 다진 것과 화이트크림소스의 꾸덕하면서 깊은 맛이 일품이다. 고기소스가 매우 훌륭해서 요즘 친구들과 자주 가는 곳이다. 먹을 생각에 벌써 군침이 돈다.

먹을 생각하면 오늘 이 크롭티를 입으면 안 되지만 모처럼 나가는 강남역이라 패션을 포기할 수가 없다. 쿨톤인 내 얼굴에 딱 맞는 하늘색 크롭니트에 청바지를 입었더니 기분까지 청량하다. 환절기에 배꼽을 내놓고 옷이 그게 뭐냐며 엄마의 잔소리가 끝이 없다.


‘나연아~~, 더 예뻐졌다, 얘. 어머 너 지난번에 이 크롭 니트 계속 사고 싶다더니 기어이 질렀구나?’


‘아웅, 지지배, 눈치도 빨라 이거 알아보는 사람 너뿐이다.’


둘은 간만의 수다를 풀면서 초당옥수수뇨끼와 화이트라구 파스타를 배 터지게 먹었다.


식사 후 강남역 주변 쇼핑이라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나연의 배가 슬금슬금 아파온다.

생리 때는 이미 지나갔고. 체하기라도 했는지 등에 식은땀도 났다.


‘너무 급하게 먹었나 봐, 채영아, 어떡하지? 나 배가 너무 아파서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채영도 걱정된 표정이다.


‘모처럼 너 만난다고, 오늘 엄마한테 나 늦을 거라고 기다리지 말라했는데, 힝. 밤까지 실컷 수다 떨며 놀려고 했더니 꽝 돼버렸네. 다음 주를 또 기약할 수밖에.’


아쉬워하는 채영을 뒤로하고 서둘러 2호선 지하철역에서 헤어졌다. 나연은 급한 대로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사서 먹고, 쌀쌀해진 날씨를 실감하며 다음에 오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아까 약국에서부터 계속 나연을 따라오던 시선이 따가웠었다. 헐거운 청바지에 갸름한 얼굴을 한 20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자, 나연이 돌아보니 머쓱해하며,

‘저, 그쪽이 너무 제 스타일인데 사귀고 싶어서요. 전화번호 알려줄 수 있나요?’


힐끗힐끗 훔쳐보는 게 재수 없다. 예쁘다는데 하지만, 오늘은 배가 아파서인지 대꾸할 힘도 없다.


‘전 관심 없거든요. 그쪽은 완전 제스타일도 아니구요.’


별 한심한 놈 다 있구나 싶다.

마침 저편에서 나연을 구해주기라도 할 듯 열차가 들어온다.





지금 , 사당역 방향으로 가는 외선순환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 틈에 끼여 지하철 안으로 밀려들어간다. 앉을 좌석을 스캔한다. 없다. 저쪽에 보니 경로석에 자리가 있다. 맞은편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가 주위를 자꾸 두리번거리는 게 신경이 쓰이지만 배가 아픈 나연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못 돼서 노란 경로석에 후다닥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나연이 경로석에 배를 움켜쥐고 앉자마자 맞은편 아저씨와 눈이 딱 마주쳤다.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가 왜 경로석에 앉았냐는 눈빛이다.


‘뭘 보는 건데?’


나연은 도전적으로 쏘아보았다. 아까 그 전화번호를 따려던 젊은 놈이 생각났다. 크랍니트를 입은 자신이 도대체 뭘 잘못한 건지,


‘왜 이렇게들 나를 짜증 나게 훑어보는 거야, 아이씨.’


맞은편 아저씨는 나연을 한번 스캔하는 듯 하더니 또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정말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나이 들어 할 일이 저렇게 없나?’

그러다 나연은 기겁했다. 맞은편 아저씨가 두리번거리더니 손을 바지 안으로 쓱 집어넣어 그 부분을 만지는게 아닌가.


엄마가 학교 다닐 때 본 적 있다는 그 바바리맨 같은 건가?

나연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불쾌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눈이 딱 마주쳤다.

‘미친놈, 손이 어디 들어가 있는 거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나연은 이런 무언의 욕들을 눈으로 발사하고 있었다.

나연은 습관처럼 긴 생머리를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확 보냈다. 배가 아파 크롭니트를 살짝 내렸더니 니트 어깨끈이 내려와 다시 양손으로 올려 고정한다. 이 장면을 놓칠세라 맞은편 늙은이가 보고 있다가 나연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이제는 참을 수 없다.

‘저 변태 같은 새끼가 내 가슴을 쳐다보고, 아까부터 이상한 짓을 하네.’

'바지 중앙에 얼룩도 진것 같고, 냄새도 나는것 같아 불쾌해 씨.',


나연은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공공장소에서 성추행이나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적극적으로 소리치라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악, 저 아저씨가 날 보면서 자꾸 이상한 짓을 해요.’

‘제 가슴을 보고, 자기 물건을 만지면서 저를 자꾸 힐끗힐끗 쳐다본다구욧.’


이미 주변 승객들은 좋은 구경이라도 난 듯 나연과 아저씨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켕기는 게 있으니까 저렇게 우물쭈물하는 거야. 나쁜 놈.’


나연은 이미 지하철 경찰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사당역에서 지하철 수사대 경찰이 호출되었다. 경찰들은


‘거, 점잖은 신사분이 할 일이 없어 맞은편 여자를 보며 자기 물건을 만지시나.’


하는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고가 접수되어 서까지 가서 잠시 조사받으셔야 합니다.‘


경찰들은 단호했고, 나연은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추행범이 도망가기 시작한다. 사당역 4번 출구로. 이런 젠장,


나연은 저런 몰상식한 사람들은 지구 끝까지라도 가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건을 정식으로 접수하고 신고하고자 했다. 아픈 배는 약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더 놀라운 일을 겪어서인지 어느새 진정이 되어있었다. 처음 가 보는 지하철 수사대에서 CCTV를 돌려보았다.

그런데, 지하철 성범죄담당이라는 전문가가 심각한 얼굴로 나연을 보며,


'이 분이 주변을 자꾸 둘러보는 거 보이시죠? 제가 볼 때는 성추행범이라기보다 전립선에 문제가 있는 어르신입니다. 직접적인 가해를 하거나 위협을 한 것이 아니므로 섣부르게 신고하셨다가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리가요, 눈빛이 정말 변태같았어요. 이상했다구욧, 다시 한번 더 돌려볼래요.'


보고, 또 보니 나연의 눈에도 정말 희끗희끗 흰머리 아저씨는 나연의 가슴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오므렸다가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하는 것이 좌불안석 민망해하는 쪽이 더 맞다. 두리번거리다가 어쩌다 자신과 눈이 딱 마주친 모양새다.


'헐, 그럼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해야지 도망은 왜 간 거죠?'

'아니, 아가씨 같으면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주는데 요즘 같은 사회 분위기에 뭐라고 합니까. 그리고 저 전립선에 문제 있어요~라고 솔직히 말하기도 머 하잖아요~'

듣고 보니 경찰 아저씨의 말이 일리가 있다.

신고 접수를 취소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와 쉬었다.

*이라도 밟은 기분~ 더럽다.

그날 저녁 8시 뉴스,

오늘 지하철 2호선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CCTV영상을 확인한 결과,
성추행범이 아니라
전립선 간질증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전문가의 소견이 있었습니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민주시민으로서
우리 모두는 상황을 판단하기 전에
상대방의 의도와 동기를 잘 이해하고
조심스럽게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은 사과하고자 하였으나
전립선 간질증 시민은
이미 도주하고 난 이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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