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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Nov 03. 2023

운수 평안한 날 (초단편소설)

운수시리즈 마지막편

운수 시리즈 마지막 완결편입니다. 운수가 없었던 해식, 운수 더러웠던 나연의 삶은 드디어 평안함에 이르렀을까요?


1,2편 먼저 읽고 갈께요.




‘아니, 요즘도 저런 정신 나간 놈이 있나 보네.’    

 

8시 뉴스를 본 해식의 아내는 혀를 끌끌 찬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믄 되지, 도망은 왜 가, 가길. 추잡시럽게.’

    

해식은 본인의 이야기라 무어라 항변할 수도 없어 모른척하며 아내가 얌전히 깍아 온 사과를 하나 집어 먹는다.     


‘얘, 가영아, 너도 지하철에서 조심해라, 요즘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엄마, 저건 아저씨가 도망을 가서 그렇지 오해한 저 여자가 이상한 거잖아. 요새 잘난 맛에 사는 애들이 많아. 새파랗게 젊은 애가 경로석엔 왜 앉았대, 웃기잖아.’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뉴스를 보던 해식의 가족들은 도마 위에 그날 해식의 해프닝을 올려놓고 칼로 마구 회를 치고 있다. 다들 아버지의 이야기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해식은 딸이라도 자기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아 마음에 살짝 위로가 된다.    




하루의 피로가 몰려오는데도 침대로 가지 못하고 해식은 생각할 것이 많은 듯,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서재에 앉았다. 오후에 지하철에서의 일을 생각하니, 자신에게 화가 난다. 요즘 통 되는 일이 없다. 얼마 전 퇴직을 하고, 삶이 평화롭게 잘 흘러갈 줄 알았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서 새벽같이 출근하고 고3 보다 더 성실하게 하루를 살았다.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고 다람쥐 쳇바퀴같았던 그의 삶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이제사 여유롭게 친구도 만나고 좋아하는 등산도 하려고 했다. 삶의 긴장이 풀려서인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시간이 몰려와서인지, 몸이 먼저 망가지는 신호를 보내온다. 아내가 열어달라는 통조림 병 따개도 쉽게 열리질 않고 전립선에도 이상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오늘 이런 일을 겪었다.   

  

퇴직 후 생활이 느슨해지지 않기 위해 매일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적어두고자 컴을 켰다. 무의식적으로 다음 포털사이트부터 열어본다. 뉴스창을 열어보니 오늘 8시 뉴스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타임톡이 올라와 있다.       

    

대한민국 지하철에서 이런일이, 헐ㅜ
이런 내용이 기사깜일까, 안보이면 좋겠다
지난번엔 여자 치맛 속 사진 찍는 놈 있더니 이번엔 힐끗남 ㅠㅠ
젊은 처자가 왜 경로석에 앉음? 정신나간거 아님? 뻔뻔하네.
와 전립선 간질증이란것도 있음? 난 젊어서 모르겠네 헐
그 아가씨 싸이코패스 아님?
근데 아저씨 도망은 왜 감?’          


해식의 가슴에 2차, 3차로 못을 박는 댓글들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그 와중에 해식의 편에서 이야기 해주는 댓글들에는 왠지 모르게 동질감이 느껴진다. 위로가 된다. 자신도 모르게 좋아요를 누르고 있다.          

저는 비뇨기과 의사인데요 지하철 전립선 간질증 환자분, 연락주시면 무료 진료해 드릴께요.   

해식은 사람들이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안주 씹듯 와그작 와그작 씹으며 가십거리로만 여길줄 알았다. 그래도 그중에 한 둘 아니 서넛은 자기의 입장에서 이야기해주고, 이런 젠장 이제는 착한 비뇨기과 의사가 공짜진료까지 해 줄테니 연락하라고 한다.  




나연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내과에 들러 체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처방전을 받아들고 약국에 들러 다시 약을 받아들고 긴 하루를 실감하며 집에 돌아와 거실 소파에 실신해 뻗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인터넷 뉴스로 자신의 기사를 접했다. 역시 신고를 했던 게 성급했다.

    

 ‘넌 항상 너무 성급해, 차분하게 생각하는 버릇을 들여.’     


엄마가 말했던 게 생각났다. 뉴스 타임톡에서는 오늘의 사건사고로 난리가 났다.           

20대 크롭티녀 완전 나르시시트네.
다들 잘난 맛에 사는 듯.
ㅋㅋ 여자들이 다 그렇지 ㅂㅅ
도망간 아저씨만 불쌍하네.
앗, 오늘의 코메디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도망간 아저씨 어쩔거임 책임졋
신고는 왜 함? 확인부터 했어야지.
영상공개 가즈아          


나연이 배가 아팠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나연을 나르시시트에, 이상한 여자로 마녀사냥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연은 2호선 지하철을 타면 이젠 경로석쪽은 쳐다 보지도 않는다. 일반석에 앉아 있다가도 60대의 아저씨들이 서 있으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예전의 나연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지난번 아저씨를 만나면 사과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회색바지의 흰머리가 희끗한 산만하던 아저씨는 2호선에서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지금, 사당역 방향으로 가는 외선 순환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해식은 아내와 부부동반 모임이 있어  2호선 강남역 앞에 서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자신들의 일상을 살아내느라 다들 바쁘다. 오직 해식만이 2호선을 보며 힘들었고, 한동안 혼자 2호선을 타는 일이 꽤나 어색했다. 제일 편하게 즐겨 입던 회색 바지는 이제 입지 않는다. 지난번 지하철 난리를 친 통에 비뇨기과 진료도 부지런히 받아 거의 완치되었다.   


’여보, 지하철 문 닫힌다구요. 얼른 타요, 얼른.‘    


성질 급한 아내가 해식의 손을 잡아 이끈다. 경로석은 비어 있지만 더 나이드신 어르신들을 위해 해식은 앉고 싶지 않다. 경로석에서 멀찍이 떨어진 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런데 경로석 좌석을 보니, 두둥 20대 아가씨가 경로석 세칸을 다 차지하고 앉아 있다. 급하게 어딜 가는지 화장하느라 정신이 없다. 머리에는 분홍색 구르프를 야무지게 말았다. 요즘 세대들은 저게 머리핀처럼 유행인가보다. 경로석에 펼쳐 놓은 그녀의 화장품이 위태위태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맞은편 할머니가 한 말씀 하신다.   

  

'아, 요즘 젊은 것들은 싸가지가 없어. 왜 경로석 자리를 지가 싹 다 차지하고 앉아서 저거서 화장을 하고 있나 몰겄네.'     


해식은 지난번의 트라우마때문인지 아예 돌아서서 거울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젊은 친구들이 무엇을 하든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관심두지 않으리라 다짐, 다짐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계속 말했다.  


'할머니 제발 아무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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