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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Nov 22. 2023

다시 설레고 싶다

두번째 스물다섯,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아침에 눈을 뜨고서야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익숙했던 곳으로부터 떨어져 와 있음이 실감 났다.

습관처럼 오늘 아침메뉴는 뭘로 할까 고민을 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가만히 누워 있다가 그제야 깨닫는다.


'아, 참 누군가를 위해 밥을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유롭기만 하다. 공간이 주는 고요함 속에 오직 나의 움직임만이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지브리 피아노 ost를 켜 놓고, 커피를 한 잔 한다.


'아이들은 뭘 먹고 있을까?'


매일해오던 습관이라는 게 무섭다. 서울에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뭐라도 먹고 있겠지.' 우리 아이들을 믿고 나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베란다 창문을 여니 아주 맑은 애월의 하늘이 깨끗하게 펼쳐져 있다. 비록 내가 원했던 돌담, 마당, 독채인 숙소는 아니지만 맑은 하늘과 바다가 보이니 여기가 천국이다.

숙소에서 바라본 애월 바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내볼까?'


여름이니 해가 일찍 뜬다. 일단 걸어보자. 이른 아침이라 주변은 조용했고, 혼자만의 시간이 오롯이 느껴진다. 집 주변의 올레 16코스길을 걸으며 주변을 구경해 본다. 숙소에서 오른편의 올레코스로 걸어 내려가니 구엄포구쪽이다. 이곳은 구엄리 돌염전이 있는데, 해안가에 깔려 있는 암반 위에 바닷물을 이용해 천일염을 제조하여 생활에 도움을 얻었고, 여기서 생산된 돌소금은 맛뿐 아니라 색깔도 독특해서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나무위키) 일출보다는 일몰이 더 예쁘다고 하니,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와봐야겠다. 구엄리 돌염전은 제주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다고 하니 횡재했다. 올레길 왼편으로 보이는 애월바다는 맑은 붓으로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이 예쁘기만 하다.

구엄포구 돌염전과 올레 16코스 주변풍경



구엄포구를 사부작사부작 천천히 걸었다. 무언가 계획을 세우고 나를 그 속으로 밀어 넣기보다는 잘 살아온 나를 위해 여기 있는 동안만큼은 쉬어야겠다. 여기서 충분히 지난 시간들을 비워내기 위해서 매일 걷기로 결심한다.


얼마나 원했던 시간과 환경인가. 푸른 제주의 하늘 위로 혼자서 아등바등했던 지난 시간들이 오버랩된다.


어디선가 읽은 구절처럼 잘 살아왔고, 잘 살아갈 거야 나에게 격려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 쉼과 격려.


그런데 공간이 주는 무게감 때문인지 혼자 있는 여유 때문인지 자꾸만 차분해진다. 텐션을 올려야 해.


간단히 아침을 먹고, 도서관에 일단 가보기로 한다. 가까이에 애월도서관이 있었다. 책이음 서비스를 신청해 왔으니 5주 가까운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들러 언젠가 읽은 적이 있던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와 브레네 브라운의 마음 가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빌려와야겠다. 이 책이야기는 다음에 천천히 다시 할 것이다.



결혼은 나의 많은 부분들을 바꾸어 놓았다. 결혼이전에는 분명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내 인생을 스스로 계획하고 모든 중심에 내가 있었는데. 결혼을 한 후, 나는 어느 사이 가족이라는 거대한 중력에 이끌리듯, 희생과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그 안으로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엄마로서의 숙제도, 아내로서의 책임도 어느 정도 했으니, 백세인생 중 남은 절반은 나를 중심에 두고 살아봐야 되지 않겠나.  


가슴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스무 살에만 가슴이 뛰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 가슴이 뛰는 게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우리는 누구나 청춘의 마음이 된다.
이곳에서의 쉼을 통해 나는 지난 시간을 비워내고,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무엇으로 채우고 싶은지 물어 볼 것이다.  
그 무엇은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이면 좋겠다.
앞으로 나아가길 주저하질 말자.




카톡 카톡,

멍한 생각에 잠긴 나를 깨우는 요란한 카톡소리.


'자기야, 나 김포 공항이야. 좀 있다 봐.'


앗, 남편이다. 적색경보다.

가슴이 설레는 게 아니라 철렁 내려 앉는다. 쿵쿵 뛰기 시작한다.


'나 혼자 쉬러 온 거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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