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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Dec 06. 2023

사려니, 사려니

사려니숲길, 제주, 쉼

어제도 사막모래 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 리 십 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쏟아진 빗줄기가 순식간에 천미천 같은 개울을 이루고


우리도 환호 작약하며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


나도 그대도 단풍 드는 날이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길을 끊어 놓은 폭설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 준 걸


고맙게 받아들인 삼나무 숲길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간산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사려니 숲길 도종환






고요한 사려니 숲길을 걷다


커다란 삼나무, 소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를 만난다


나무들 사이로 붉은 화산송이를 밟고

햇살은 나무 사이로 내려앉았다.

     

나무에서 떨어진 씨들은

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매년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만들며

무럭무럭 나무로 커간다.


제 할 일들을 말없이

열심히 해 내었다


                                                              그리고 가지를 뻗어

                                                              각자의 꿈을 향해 커 나간다   

  

모든 나무와 숲은 작은 씨앗에서 출발했다.  
   

나도 오늘 사려니 숲길에

아무도 모르게

작은 씨앗 하나 심어 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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