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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Nov 29. 2023

곶자왈의 위로

적색경보가 울리면 대피를 해야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그는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해 주는 사람이며 지금 내가 누구보다 걱정돼서 오는 것일 게다. 사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계획해 떨어져 본 적이 없기도 했다. 공항에 그를 데리러 가면서 어디를 가고 쉼을 얻는 것도 이 나이엔 이렇게 힘든 일인가 싶었다.     

그는 아예 한 짐을 싸서 왔다. 그 의미는 한동안 머무른다는 뜻이다. 크고 넓은 집을 구할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제주에 일이 있다고는 말하지만, 딱히 믿음이 가진 않았다.     

숙소에 도착하고 짐을 풀면서 말이 너무 많다. 이 남자,

여기 있는 동안 아침 식사는 본인이 준비를 다 할 것이며, 본인은 많이 바쁠 것이며, 아이들에게 야무지게 일러두고 왔으며, 일이 있으면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너는 계획대로 너의 할 일을 하라고.(나는 옆에 있는 당신이 신경쓰인다구요)     

첫 단추부터 너무 잘 풀려서 웬일인가 했다.    

 



“너, 이번 달에 왜 연금저축 안 넣었어? 복리효과 극대화하려면 꾸준히 해야지."

"음, 아빠 이번 달에는 연금저축 못 넣을 것 같아요, 방학에 좀 쉬면서 여행도 하고, 놀고 싶기도 하고……. ”

“너는 뭘 하든 꾸준히 해야지, 방학이라 쉬고, 힘들다고 쉬면 언제 할 수 있겠냐.”    

 

  남편이 오자마자, 서울에 있는 아들과 남편의 1차전이 있었다. 늘 있었던 소통의 문제들, 아니면 세대 간의 갈등인가. 아들은 전역하고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쉬면서 놀지 못했다고 이번 방학만큼은 즐기고 싶어 했다. 학기 중에도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고 부족한 용돈을 메꾸며 저축했다. 친구도 만나고 싶고 여행도 하고 싶은 이십 대를 남편은 저렇게 타박한다.(나는 당신의 이십 대가 참으로 궁금하오)          

  전화로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의 논쟁을 듣다가 집중이 안된다. 피곤하다.



제주 곶자왈에 가보기로 한다. 숲이라는 뜻의 ‘곶’과 자갈이라는 의미의 ‘자왈’로,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용암 원시림이다. 정돈되지 않은 그대로의 숲, 제멋대로의 나무들 하지만 무질서에서 나오는 고대의 신비로움처럼 제주만의 기운이 느껴지는 숲이다.    

곶자왈 도립공원 입구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하늘도 맑다가 갑자기 잔뜩 움츠려 무게감을 더한다. 곶자왈은 입구에서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 구멍으로 사라지듯이 순간 나를 삼켜버릴 것 같다. 그렇게 초록의 입구로 빨려 들어가니 세상과 단절되는 기운들이 나를 감싼다.           

  화산활동의 잔재들인 암석으로 만들어진 길과 흙으로 이루어진 길, 나무로 만들어진 길이 구불구불 굽이져 끊임없이 나온다. 5개의 탐방로 코스 중에 왠지 끌리는 테우리길을 택했다. 들리는 새소리가 숲의 여백을 메꾸는 듯, 혼자 걷는 게 아니구나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양옆으로 고사리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위, 아래로 뻗어 숲을 가득 채웠다. 이제는 먹구름 낀 하늘도 그 푸르름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 곶자왈의 이러한 은밀함 때문에 4.3 항쟁 때에는 제주 주민들의 훌륭한 은신처였다고 한다. 오늘은 이 숲에 내가 숨어버리고 싶다.          

  눈으로 이 풍경들을 담고 마음에 새긴다. 살기 위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애쓰는 작은 풀들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가 문득 아들이 보고 싶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자유로운 영혼을 아빠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의 틀 안에 가두고 싶어 한다. 우리 세대는 그저 열심히만 살아왔다면 아들에게는 투자나 경제개념을 미리 가르치고 싶은 남편의 뜻도 잘 안다. 그러나 현재가 더 중요한 아이에게 노년을 위한 연금이 와닿기나 하겠는가. 그런 젊은 세대를 이해 못 해주는 남편이 꼰대같이 느껴지고 얄밉다. 발 앞에 울퉁불퉁 모난 자갈을 남편인양 괜히 차서 옆으로 치운다.(에잇, 저리 가버렷, 못난 자갈)          

  아이들도 성인이 되었고, 혼자 있고 싶어 떠나온 곳에서 여전히 삶의 문제를 떠나오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서울의 여느 공원이나 숲과는 달리 꾸미지 않아 더 자연스러운 이 곶자왈에서 이름 모를 나무들과 풀을 통해 작은 위로를 받는다. 그대로 두었기에 본연의 모습으로 잘 자랐을 생명력 넘치는 이 나무들과 풀들을 보며 기특함을 느낀다.           

  그 생명력이 나에게 기운을 주는지 차분한 위로가 된다. 불구덩이 같았던 마음이 어느새 누그러졌다. 구석기 유물같은 남편에게 곶자왈의 신비로움을 얘기해 주어야겠다. 우리 아이들도 그대로 두면 그 자리에서 햇빛과 바람도 맞고, 비도 맞으며 자신들의 삶을 잘 살아갈 것이라고. 이제 우리는 조용히 뒤에서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힘들다고 하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큰 나무의 그늘이 되어주자고.

곶자왈의 자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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