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에 아주 살러 가는 사람처럼 필요한 것들의 목록을 열심히 적고, 미니멀리즘을 외치면서도 물건들에 집착하고 있었다.
먹는 욕심 없다고 해 놓고, 이것저것 해 먹을 생각에 온갖 양념들 다 챙기고, 여름이니 간편하게 입어야지 해 놓고, 청바지에 흰 셔츠랑, 원피스는 색깔별로 고르고 또 고르고 있었다.
바닷가에선 모래사장을 걸어야 되니 쪼리 들고 가야 되고, 올레길 걸으려면 운동화도 필요하고, 형식적인 모임이 있을 수도 있으니 굽이 있는 신발도 하나 필요하고, 신발만 도대체 몇 켤레를 챙기고 있는지.
그러다,
‘그래 떠나기 전 이것부터 연습하자, 내려놓기.’
살면서 불어난 건 내 몸에 살들만이 아니었다. 집안 곳곳 없어도 되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떠나는 몸도 가볍게 ~
다시 돌아간다면
한때 드라마의 유행이 회기물이었다. 시간여행물이나 타임슬립물처럼 과거로 돌아가 인생 다시 살기.
나는 어쩌면 이젠 돌이킬 수 없지만, 쉼을 통해서 과거의 그 시점에 내 마음의 열정을 찾아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퍼즐을 맞추듯, 스무 살 시절의 나에게로 돌아가본다.
남편이 귀한 아들이듯, 나도 엄마에게 귀한 딸이었고, 꿈이 있었는데, 왜 먼저 내 꿈을 양보했는지. 아이는 왜 덥석 둘이나 대책 없이 낳아버린 건지 그때의 나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렇게 사랑이 좋더냐~
나름 공부하면서 애를 낳으려고 자녀계획은 ‘미국 공부 마치고’로 세웠지만 시아버지는 맏며느리가 행여 애를 못 낳는 거 아닌가 노심초사하셨다.
결혼 후 얼마 뒤 손만 잡아도 애가 들어선다는 보약까지 보내주셨다. 그 약 덕분인지, 미루었던 자녀계획은 무너지고 결혼 6개월 만에 조금 빠르게 첫 아이를 가졌다.
미국에서 돌잔치를 하던 날, 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을까.
임테기에 선명하게 둘째의 흔적이 두줄로 다가왔다. 철없는 남편은 ‘만세’를 불렀다. 이게 만세 부를 일인가.
축하 샴페인과 큰 케이크, 예쁜 꽃다발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은 내 인생에 대한 불안한 예감과 겹치면서 그렇게 나에게 오버랩되었다.
큰아이 돌잔치 겸, 둘째 임신파티 겸으로 그날 모인 지인들이 축하해 주었고, 모두가 행복했다. 나 빼고. 큰 애 돌잔치에 둘째가 생겼으니, 이것의 의미는
‘육아에 원 플러스 원으로 올인해야 된다’,
‘이제 너의 인생은 없을 걸~’
이라는 것임을 그때는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 명,
친정엄마는 알고 계셨나 보다.
‘아이고, 공부하라고 유학까지 보냈더니, 해마다 애를 낳네, 낳아.
네가 흥부냐 해마다 애만 낳게.’
그렇게 남편은 흥부가 되고 나는 흥부 마누라가 되었다. 엄마는 축하는커녕 딸의 앞날이 보였던지 마냥 속상하셔서 뭐라 뭐라 하셨다. 그 둘째 딸아이가 지금 대학생이 되니 그때 엄마의 마음을 이제 감히 짐작할 수 있다. 연로하신 아버님은 보약을 먹지 않고도 덜컥 둘째를 가진 나를 아주 대접해 주셨다.
‘등짝이라도 패서 공부 다 하고 결혼하라고 하시지.’ 괜히 떠날 짐을 싸면서 엄마를 원망하고 있다. 그러나 내 인생이 드라마처럼 타임슬립이 된다 한들, 나는 아마 또 아이들을 택할지도. 가족에 대한 무슨 대단한 책임감인지 모를 이 마음 때문에 늘 내 인생은 양보만 하고 있다. 그 또한 나의 선택이었으며 책임감은 오롯이 내 몫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처음엔 남편을 원망했지만 결국 이 가난한 남자도 내가 선택하지 않았냐 말이다.
그때의 우울증은 남편이, 어린아이들이, 가난이, 미국이라는 외롭고 낯선 환경이 주는 종합선물세트인지 알았다.
그러나 결국 그런 외적인 요인 외에 나는 여리고, 상황이 꼬일수록 안으로 안으로만 가라앉는 사람이었고, 내 마음의 작은 창하나 없이 진실된 소통을 누구와도 못했기 때문이었으며,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며 여유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가끔은 불어주고, 햇빛이 내리쬐는 쉼 같은 내 마음의 창. 그 창을 통해 나는 마음의 봄, 여름, 가을들이 보고 싶었는지도.
‘제주 살 집을 구할 때 3D를 고려해 줘.’ ‘단독, 돌담, 마당’
남편은 아내가 살면서 이제 목소리를 자꾸 높이니 스스로 적응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무슨 스물다섯 처녀도 아닌데 단독은 혼자 살기 위험해서 안 된다, 빌라형 주택으로 알아보자 한다.
‘한라산을 뒷배경으로, 마당이 있고, 앞으로는 제주 바다가 있었으면 해.’
나의 요구사항은 자꾸 늘어난다. 때마침 뉴스에서 제주 중산간 지방에 들개가 출몰해 근처 농장에 말과 돼지들이 곤란을 겪는다고 했다. 비가 오면 중산간 지대의 축사에서 냄새도 꽤 난다며 남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도 포기.
결국 시장 가깝고, 사람들 많은 해안가 지역의 제주 서부 애월로 결정되었다.
‘애월’
얼마나 예쁜 이름인가.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이름이다. 이효리가 살아서 유명해지기도 했고 지금은 카페거리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해가 지는 한담해변이 가까워 산책하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는 다행히 관광지와는 떨어져 있어 조용했다.
‘너네 아파트 분리수거는 목요일인 거 알지? 베란다에 화분 물 주는 거 잊지 말고, 아예 주말에 몰아서 줘. 여름이라 에어컨 틀어도 환기는 자주 해주고 알았지?’
겉으로는 가족을 걱정하는 모습이었지만 마음속으로 나는 이미 집을 떠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떨어져 보기는 처음이라 걱정도 되었지만 이 마저도 내려놓기~
금세 소풍 가기 전날처럼 들뜬 마음이 되었다.
배를 타고 가니, 차도 가져갈 수 있다. 남편이 내 꿈을 응원한다며 사준 핑크색 노트북과 운동 욕심에 2킬로짜리 아령은 꼭 챙겼다.
그렇게 서울을 떠나, 처음 가 본 목포에서 완행열차가 아닌 제주행 퀸제누비아호에 몸을 실었다.~ 이제 집 생각은 그만. 다 내려놓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