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단 한 조각이라도
할머니가 지금처럼 아프시기 전이었다
90에 가까운 나이에도 언제나 곧고 올바르게,
정정한 삶을 살아오셨기에
이별은 아무리 준비했대도 내게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하루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일정에
끌려가듯 가야 했던 날이었다.
그 주는 할머니가 몸이 정말 좋지 않아서
내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는데,
뭐에 홀린 듯 급한일을 마구 쳐낸 참이었다.
일정을 마치고 잠시 티타임을 가지게 됐는데,
그날 처음 가까이서 뵌 대표님과의 시간이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굳이 내게 왜 이런 시간이 생긴 걸까 ‘ 하는 마음에
의례적으로 앉아있는 나에게
그분은 친절히 안부를 물어주셨다.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일적인 부분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마친 터였다.
갑자기 또 다른 고민이 없냐고 하시는데,
그제야 그날 하루 종일 내 머릿속을 채우던
할머니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실은 제가 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저를 키워주신 할머니가 지금 몸이 너무 안 좋으세요.
그 걱정 때문에 오늘도 마음이 어지러웠어요. “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시던 대표님이
문득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셨다.
후에 알고 보니 그분도 어머니를 여의신지
얼마 안 된 참이었단다.
“나도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나는 어머니를 참 좋아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가 떠났다고만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도 나와 함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머니 물건들도 버리지 않고 두면서,
그를 보며 어머니 생각을 하고
또 늘 듣고 계시다고 생각하며 대화도 합니다.
죽음은 언젠가는 기필코 찾아오는 일이라
우리가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별이 완전한 이별은 아니지 않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더 잘 견딜 수 있을 겁니다 “
이런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다.
사실 이미 내 얼굴은 눈물이 뒤범벅되어
정확한 뉘앙스가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참 와닿는 이야기들이었다.
사실 모르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수십 번씩 할머니와 헤어지는 꿈을 꾸며
눈물로 잠을 깨우고,
장례를 미리 대비해 가면서 모를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저 ‘진짜 어른’이 필요했던 것 같아.
자기의 마음이 미어진다며 내게 병간호를 떠넘기는
그런 가족이 아니라,
나보다 더 눈물지으며 할머니 병실을 나가버릴
그런 아들이 아니라,
‘모두 다 그래. 누구나 겪는 일이야.
나도 겪어봤는데 이렇게 지금 살아가고 있잖아 ‘
하고 덤덤히 이야기해 줄 성숙된 어른이,
진짜 어른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때때로
나는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단 사실을
이번일을 겪으며 느끼게 되었다.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말이 있지 않나.
신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 장소와 그 순간으로 이끌어 준다는 말을
조금이나마 실감하게 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