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잔치국수의 연관성

이 세상 단 한조각이라도

by 어제의 오늘

당신의 온기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겨울철 떠오르는 면요리라 하면

당연히 따뜻한 국물의 국수 한 그릇이 아닐까.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요리가

누군가에게는 깊은 추억으로 남아있기에.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나서

평화롭게 은퇴를 준비하던 한 시골마을에

덩그러니 남겨진 갓난아이 하나.

그게 나였다.

깨져버린 관계 사이엔

언젠가 그 사랑의 결실체였을 아기하나가 남았다.


나는 그렇게 나를 덜컥 맡아버린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내 인생은 돌아보면

꽤나 막장드라마스러운 줄거리였음에도,

무한한 사랑이 있었기에

밑 빠진 독에도 언젠가 물이 차오르듯

그렇게 자라났다.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것은 어디에서나 먹을 법한

따뜻한 ‘잔치국수 한 그릇’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손을 잡고

매주 일요일 교회를 가곤 했었는데,

그 교회에서는 주일예배를 마치면

점심식사로 잔치국수를 주었다.

손을 꼭 잡고 내려와 나란히 앉아 먹는

작은 국수 한 그릇은,

배가 채워짐과 동시에 마음 한편을 데우는

온정의 한 그릇이었다.

음식은 누구와 어디서 먹느냐에 따라

다양한 맛과 향기로 기억되는데,

그렇게 먹었던 따뜻한 국수와 추운 날의 어묵꼬지는

지금까지도 오랜 내 추억에 남았다.

국수는 매일의 반찬거리를 걱정하는 할머니에게

좋은 대체메뉴가 되기도 했는데,

입맛이 없는 날에나, 늦은 저녁 허기가 질 때면

어김없이 냄비에는 멸치 몇 마리를 띄운 국물이

끓기 시작했다.

평범한 음식인데, 할머니의 수제 양념간장이 들어가면

왜 이리도 맛있는 한 끼가 되는지

반찬투정을 하던 어린 나이에도

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날이 많았더랬다.

흔한 요리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의 규칙은 존재했는데,

면은 꼭 소면일 것,

국물은 다시다를 넣지 않고 멸치로만 맛을 낼 것,

그리고 양념간장은 참기름과 파를 다져 넣은

수제 간장일 것 등이었다.

면은 예로부터 장수를 의미하고,

축하하는 자리에나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든든한 식사로 내어지곤 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국수〉 中

허옇고 심심한 면은

오랜 역사동안 우리 내와 함께 해오면서

여름엔 시원한 동치미국물과

때론 빨간 양념에 비벼져 내어 지고,

겨울엔 김이 폴폴 솟는

뜨끈한 국물에 담겨 내어지곤 했다.

길고 얇은 형태가

사람과 사람사이를 잇는 하나의 연결고리처럼

오래도록 우리를 이어주는 따뜻한 음식이 되었다.

그리고 이 국수 한 그릇은

할머니와 나사이를 잇는 추억의 요리가 되었다.

이제 나의 할머니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고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음식이 되었기에

더 애틋한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온기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할머니의 요리를 떠올리면

나는 어김없이 깊은 생각의 굴레로 빠져버린다.

내게 한겨울의 따뜻한 국물 같은 그 국수 한 그릇이,

그처럼 내 앞에 늘 놓아지던

당신의 온기가 담긴 한 그릇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내가 준 고통의 시간들을 모른 체 할 수 없어

당신의 인생에 내가 없었더라면.

하고 이런저런 가정을 해보게 된다.

딸 한번 키워본 적 없는 아들만 셋인 집에

어느 날 던져진 작은 여자아이는 무럭무럭 사랑을 받아

이제 그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좋은 양분 위에 큼직한 열매가 결실 맺듯

이제 내가 받았던 무한한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주 힘든 날이 찾아와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날이 와도

그 마지막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그럼에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 것은

언젠가 아주 그리워질

사랑과 온기가 담긴 요리 한 그릇인 것이다.

사람은 항상 놓치고 나서야 귀중함을 깨닫게 되고,

나는 이제 더듬더듬 어설프게

할머니의 맛의 길을 따라간다.

추억에 기대어 맛의 길을 찾다 보면,

내게 내어진 한 그릇이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었는지

아주 조금이나마 가늠하게 된다.

내가 어설프게 흉내 낸 세월의 맛은

과거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요리를 맛있게 드셔주시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나는 자꾸만 감상에 젖는다.

아주아주 그리울 것이다.

투박한 손에 담긴 사랑의 음식이,

그 손을 타고 건네지던 한 없는 사랑이,

지금 곁에 있어도 아주 그리운 당신이,

나는 오래도록 그리울 것이다.

그래서 잊지 않을 것이다.

나를 만난 것이,

내가 인생에 찾아간 것이 후회되지 않도록

세상을 밝게 비추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아주 추운 겨울날 몸을 녹일 수 있는

작은 온기 같은 사람은 될 수 있도록.


당신의 한 그릇에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될 수 있게

나는 계속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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