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치기와 눈이 마주친 순간

트라우마

by 날자 이조영

20대 초반의 일이다. 친구와 약속이 있어 외출하던 날.

자판대가 늘어서 있는 거리. 그 근처의 건물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50미터쯤 떨어진 곳의 액세서리 자판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데...'


자판대 앞 풍경이 묘하게 거슬렸다. 한 여자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들. 여자는 액세서리를 고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고, 양옆으로 두 남자가 바싹 붙어 서 있었다. 또 한 남자는 망을 보듯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여자 액세서리 자판대에 웬 남자들이 있지?'


수상쩍은 마음이 들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사람들이 오가는 번화가에서 그 모습이 유독 확대되고 선명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흐릿하고 느리게 보였다. 그 속에서 여자를 둘러싼 세 남자의 모습만 또렷했다. 마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세 남자의 동작 하나하나가 클로즈업되듯이 보였다. 여자에게 바싹 붙어서 있던 왼쪽 남자가 여자의 가방 아래를 찢는 게 보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매치기다!!!'


아무것도 모른 채 쇼핑에 정신이 팔려 있는 여자.

그 순간.

망을 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무서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어떡해, 내 얼굴 봤어.'

'잡으러 오면 어떡하지? 도망가야 해.'


몇 초가 몇 시간처럼 느껴지며 식은땀이 쫙 흘렀다. 말은 도망쳐야 한다고 했지만, 남자의 무서운 시선에 압도당한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끈덕지게 노려보는 그 남자의 시선에 두려움을 넘어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고,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소매치기를 끝낸 양쪽 남자들이 그 자리를 뜨는 걸 보며 나도 모르게 반대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남자가 쫓아와 내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은 공포심에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친구와의 약속도 까맣게 잊은 나는 정신없이 인파 속에 파묻혀 걷기만 했다.




그날 어찌어찌 친구를 만나긴 했다. 만나자마자 소매치기와 눈이 마주친 얘기를 해주었다. 친구는 사람이 많은 데서 소매치기를 목격한 걸 더 놀라워했다.


나는 어떻게 소매치기를 목격하게 되었을까.


여자 액세서리 파는 곳에 웬 남자들이 있나, 의심했다.

여자 한 명을 사이에 두고 남자 둘이 너무 붙어 서 있는 모습이 매우 수상쩍었다.

그 옆에서 망을 보는 남자 때문에 소매치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 확신은 소매치기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망보는 남자에게 목격한 걸 들킨 순간,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날 이후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고, 남자에 대한 선입견이 심해졌다.(이 일 말고도 몇 번의 사건들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던 남자는 키가 크고 미남자였으며, 소매치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여서 더욱 충격이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도 이 날의 사건 후유증 때문인지 모른다.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사람 얼굴을 정면으로 본다거나 눈을 맞추고 얘기하는 게 불편하고 어색했다. 한마디로 사람이 불편해졌다.


20대 초반이라 내 인생에서 가장 재기 발랄하던 시기였지만, 그 트라우마는 알게 모르게 나를 괴롭혔다.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강한 신념 때문에 훗날 사람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고 외톨이를 자처했다. 혼자가 편한 느낌은 나를 보호할 수 있다는 안정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나에게 트라우마라는 걸 코칭 훈련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가끔 이때 일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 공포심이 싫어서 의도적으로 생각을 지워버리곤 했다.

그러나 수시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사람, 특히 남자에 대한 불신은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이미 오래전 일이었고, 별다른 해코지를 당한 게 아니었음에도 그날의 일은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 현재의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 고리를 끊고 싶었다.


분리 기법

1. 그 상황을 이야기한다.
2. 상상으로 그 남자가 안 보일 때까지 거리를 멀게 한다.
-> 느낌이 어떤가?
3. 그 남자와 나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친다. 남자는 절대 바리케이드를 넘지 못한다.
-> 느낌이 어떤가?
4. 바리케이드 너머의 남자는 과거의 사람이다. 나는 현재의 나다.
-> 느낌이 어떤가?
5. 그 남자를 영화관 스크린으로 보고 있다. 나는 관객이다.
-> 느낌이 어떤가?
6. 영화관 관객석에서 상영실로 자리를 옮긴다. 그곳에서 스크린 속의 남자를 바라본다.
-> 느낌이 어떤가?
7. 이 외에도 남자와 나를 분리하는 방법을 하나씩 떠올린다.
->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가 좋은가?
8. 피드백
->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 어떤 변화가 있는가?


내게는 3, 4번이 효과가 높았다. 남자는 절대 바리케이드를 넘지 못한다는 설정에 안도감이 컸다. 그날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며, 현재와는 다르다는 걸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방법을 해보면서 점차 공포심이 사라졌다.


트라우마는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아 삶을 방해한다. 내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심리코칭 덕분이었다. 무의식 속에 달라붙어 있던 찌꺼기들을 청소했더니, 원래의 재기 발랄한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외톨이를 자처하지도 않고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보거나 관찰하는 걸 피하지도 않는다.


트라우마는 속히 제거해야 할 심리적 암덩어리다.

트라우마가 깊어지면 크고 작은 문제가 끊임없이 생긴다.

트라우마는 과거에 생겨난 것이기에 현재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뇌의 착각을 일으켜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게 만든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과거에 얽매어 사는 것은 트라우마와 관련이 깊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완전한 분리는 각종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현재의 삶을 온전히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