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청춘이기는 한데,
요즘 들어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드는 버릇이 생겼다. 하루 왕복 3시간을 통학하다 보니 하루하루의 체력이 너무나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체력이 떨어지는 기간에는 집에 도착해 눕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졸음을 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하철이면 지하철, 버스면 버스, 머리를 기대로 앉으면 더 좋지만 앉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잘 수 있다. 특히나 고속도로를 달리면 멀미하는 나는 버스에서 잠이 더 잘 온다.
지하철에서 졸면 웃긴 상황이 연출된다. 한 정거장 꼴로 눈이 뜨인다. 내가 의도적으로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 도착지를 지나칠까 하는 긴장감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전전 전역에서 눈을 뜨고 긴 잠이 들었었다 생각하며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전 전역. 다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 잠에 빠졌었다는 기분으로 눈을 뜨면 전역. 자면서도 목적지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이런 통학 상황에서 글을 읽고, 글을 쓰기란 쉽지 않다. 삶에 대해 생각하고 행복에 대해 생각할수록 현재 나의 모습은 초라하게 느껴진다. 낭만을 이야기하기에 난 이미 지친 것이다, 땡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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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만 이렇게 힘들고 지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인천에서 서울까지 통학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나처럼 왕복 3시간 통학을 하지만 통학 노선이 나보다 훨씬 복잡하다.
물론 왕복 3시간 통학이 짧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어림짐작하는 것도 어리석고 나의 고통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수치화해서 비교하는 것도 터무니없다.
여전히 나는 길가에 시간과 돈을 뿌리고 다니는 정신적으로 피폐한 통학러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만 지쳐버린 통학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의 고통이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있고 그 누군가도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기로 한다. 운동하기, 건강하게 먹기, 일찍 일어나려고 노력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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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시작했다. 새롭게 시작한 것은 아니고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열여섯 살 때 홈 트레이닝을 한 것을 시작으로 종목을 바꿔 꾸준히 요가를 했다. 몸은 뻣뻣하고 손발은 차갑고 생리를 건강하게 하지 못하는 나에게 혈액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요가는 딱 맞는 운동이었다.
요가 학원까지 갈 시간과 여유는 없기에, 집에서 유투브로 요가를 하게 되었다. 장소가 어디든 선생님이 누구든 하루 동안의 긴장을 풀고 몸을 교정하는 데에는 역시 요가만 한 운동이 없었다. 나의 목표는 집에 돌아와 꾸준히 요가를 하고 아침 요가를 하는 것이다.
건강하게 먹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한 번에 많이 먹는 스타일보다는 조금씩 자주 먹는 스타일에 가까웠다. 워낙 간식하던 데에다 대학에 다니면서 시간표에 나를 맞추려다 보니 끼니를 거르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대신 간식은 더 늘었다. 간식할 시간 즉,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되면 위에서 위액을 내뿜었다.
이것을 한 번에 끊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위가 충격을 받고 각성해야만 할 것 같았다. 간식을 완전히 끊고 매 끼니를 최대한 챙겨 먹으려고 노력했다. 밖에서 사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엄마를 따라 샐러드를 먹었다.
일찍 일어나려고 정말 많이 노력한다. 하지만 나는 '본 투 비 아침형 인간'은 아니다. 게다가 잠자는 시간은 나에게 매우 소중하다. 잠은 나의 에너지 공급원이다. 개운하게 잠을 자고 일어나는 날에는 나의 신경세포가 리뉴얼되는 기분을 만끽한다. 들리지 않던 새소리가 들리고 뭐든 잘할 수 있다는 에너지를 느낀다.
누군가가 잠은 죽어서도 잘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감히 이 말을 한 사람이 잠의 가치를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렇다고 내가 인생의 삼 분의 일을 잠을 자는 데에 보낸다는 말을 듣고도 태평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푹 자고 일어나서도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다.
사실 이런 다짐은 이번이 n번째이다. 건강을 유지할만하면 시험 기간이라는 핑계가 생겨 마음대로 먹고 운동도 거르고 잠도 불규칙적으로 자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다짐이 조금만 더 오래가기를 소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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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치트키이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치트키가 될 수 없다. 잠에서 꾸역꾸역 깨어나고 있는 나의 식도를 넘어가는 차갑고 쌉쌀한 그것만이 나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내가 최근에 빠진 음료는 샷 추가한 흑당 밀크티이다. 흑당 밀크티를 처음 맛보는 순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많은 음식을 맛보았다고 해도 세상에는 아직 맛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재미없는 단맛이 아닌 이야기가 담긴 진한 흑설탕의 맛이었다. 어릴 때 먹던 달고나에 원두커피를 섞어서 상품화하면 이런 맛이었을까?
그렇다 해도 새로운 맛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대체할 수는 없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그 어떠한 것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 있는 것만 같다. 누군가의 하루를 시작하기도, 누군가의 다친 마음을 달래기도, 누군가에게 바쁜 하루 중 여유를 느끼게 하기도, 누군가의 젊음을 추억하게 하기도, 누군가에게 인생을 진리를 느끼게 하기도, 누군가의 일생이 담기기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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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수업에서 교수님이 '얼죽아'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고 자랑하신 적이 있다. 본인께서는 사계절 내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데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학생들을 보면 젊음을 느끼신다고.
"여러분, 저는 한겨울에도 얼죽아인 여러분이 부러워요. 추운 날에 차가운 것을 마셔도 혈기 왕성한 그 젊음을 충분히 누리세요. 내가 당장 그 젊음을 살 수 있다면 뭐라도 할 거야."
생각해보면 엄마, 아빠도 항상 뜨거운 아메리카노만 드신다. 나도 나이가 들면 얼죽아의 타이틀을 넘겨야 하는 날이 올까? 지금은 건강의 균형을 잡기 위해 마신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이가 들면 배신하게 되는 것일까?
먼 훗날 내가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젊은 약골이었을 수 있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덕분에 건강한 약골로 지낼 수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