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공지영

겨울이 와도 생활은 남는다

by 아점

사실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싶은 책은 최근 화제였던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의 원작소설이었으나 도서관에 없는 관계로 공지역 작가의 다른 소설을 빌려왔다. 내가 학생일 때는 공지역 작가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일이 여러 번 있어 나도 읽어본 책이 있었다.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 '도가니'를 읽었을 때의 그 충격은 내가 차마 그 이야기를 영상으로 볼 수 없게 만들었고 나는 지금까지도 '도가니'를 영화로 보지 않았다. 그 후 작가의 여러 작품들의 제목을 영화를 통해서든 도서관에서 책을 둘러보다가든 익숙하게 들어왔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공지영 작가의 두 번째 작품과 만나게 되었다.

이 작품은 혜완, 영선, 경혜 세 주인공에 대한 이 이야기로 그중 혜완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영선의 자살기도를 계기로 세 친구들의 만남과 대화가 잦아지며 시작된다. 처음 그들이 만난 곳은 대학교 시절이었다. 그때 그들은 꿈 많은 대학생들이었다. 여성의 인권과 평등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흘러나오는 시대를 살았기에 그들은 진정한 여성 해방을 위한 여성지를 만들기를 꿈꿨다. 경혜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딸을 낳았다고 잔치 벌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그녀의 말을 인용해 말하자면 태어났을 때 잔치 벌인 사람은 없을지라도 앞으로의 자신들의 삶은 잔치처럼 멋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보겠다고 꿈꾸던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경혜는 결혼 후 경제적으로는 당당해졌지만 바람피우는 남편 때문에 정신과를 들락거리고, 혜완은 사고로 자녀를 잃은 후, 남편과의 불화가 심해져 이혼 후 혼자 살아가고 있으며, 영선은 대학교 때 만난 남편과 함께 성공할 날을 꿈꾸며 프랑스에 갔지만 남편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청춘을 다 바치고 결국 자살기도를 한다.

그들의 유년시절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의 차별의 기억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와 동시에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자신들의 어머니와 다른 삶을 기대할 의지와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본보기라도 되는 듯이 지금 각자의 절망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작품은 그 원인을 찾고 싶다는 듯이 혜완의 회상과 현재를 교차하며 우리에게 그들의 삶을 들려준다. 주인공들보다 여성의 인권이 높아진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작품을 읽는 내내 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선이 프랑스에서 (그때는 남자친구였던) 남편을 위해 희생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남편에게 자신의 시나리오를 건네줄 때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조건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알게 된다. 그들은 매 순간 최선이라고 생각한 선택을 했다. 다만 그들은 인간적으로 모욕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자신이 있었던 여성들이었던 동시에 언제든지 모욕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며 자라났기에 그들의 삶과 소망 자체가 모순이었다. 혜완의 말처럼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었다면 그 누군가가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 행복해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고 재능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면 그것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으며, 모욕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 누구도 자신을 발닦개처럼 밟고 가도록 만들지 말아야 했으나 그들은 그럴 수 없었고 그러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삶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누가 그들의 불행에 대해 설명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려 들 수 있을까. 그들은 매 순간 자신의 모순 안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저 지나고 보니 최선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결국 두 번째 자살기도로 우리 곁을 떠난 영선의 장례식에서 혜완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를 어지럽게 하는 소리는 계속 들려오겠지만 나를 붙잡을 그물은 사방에서 던져지겠지만 사자처럼, 바람처럼 그리고 무소처럼 의연히 정진하라. 계속해서 자신과 친구들의 삶을 회고했던 혜완이 할 수 있는 최후의 말이었다.

작품은 차별당한 여성의 삶에 대한 애통의 글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나는 여성을 떠나 이들의 인간적 삶에 주목하고 싶다. 최선이라고 믿었던 결정들과 세상이 건네온 불운들이 하나둘씩 모여 나를 옥죄이는 순간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순간이니까. 그럴 때 우리는 여러 가지 태도로 반응할 수 있다. 덤덤히 받아들이거나 대상도 모르는 채 분노와 원망을 쏟아내거나 능히 이겨낼 마음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거나 무너져 내리거나. 아니면 전부 다이거나.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만이 과연 최선일까. 정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혜완은 조언한다. 부정하며 발버둥 쳐보기도 했고 받아들여 보기도 했고 희망을 가지고 씩씩하게 살아 보기도 했던 그녀가 말한다. 그냥 나의 길을 혼자서 걸어가라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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