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정기 검사가 있는 날입니다. 지난주에 미리 예약을 해 두었어요. 처음 가보는 검사소라 어제 내비게이션으로 미리 예상 시간을 파악해 두었고 동선도 알아두었죠.
아침 식사를 하다가 시계를 보니 벌써 출발해야 할 시간이 다되었더군요. 먹다 말고 서둘러 일어났습니다. 도로에는 차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시간도 예상보다 더 걸려 마음을 졸여야 했지만 다행히 예약해 둔 시간에는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와 있는 차들 뒤에 줄을 섰고, 경제 방송을 들으며 기다렸어요. 순서가 되어 검사원에게 차를 맡기고 고객 대기실로 이동했습니다. 15분 정도 소요된다고 하길래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열었어요.
그러다 시계를 봤는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9시 45분이었어요.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예약한 시간은 10시 20분이었거든요. 1시간이나 일찍 온 겁니다. 어쩐지 이상했어요.
계획대로라면 식사를 여유 있게 해야 했고, 차도 막히지 않아야 했거든요.
더 이상한 건, 이렇게 이상한 상황이 연속되는데도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고 일을 다 마친 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예전 같으면 헛웃음 정도 짓고 말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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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하고 나니 신체 여러 부위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어요. 처음엔 놀라기도 했지만 일부는 포기했고 또 일부는 회복되기도 하면서 조금씩 변화에 적응해 가고 있었죠.
그중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상을 감지한 게 있는데, 그게 기억력 저하였어요. 일상생활 중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었고, 자주 사용하던 용어였는데 아무리 애써도 기억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처음엔 노화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곤 했는데, 그 정도가 좀 심했고 자꾸 반복되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수술 후 1년 3개월의 시간이 지난, 2주 전 정기 진료 시간에 이 문제에 대해 상담을 했어요. 신경외과 교수님이 얘기하시더군요.
" 수술로 뇌를 건드린 것은 아니지만 머리 쪽에 방사선 치료를 했기 때문에 전두엽에 방사선 노출이 어느 정도 될 수 있고, 그로 인해 일부 인지 저하를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인지 저하는 나이가 들면서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니 앞으로 관리를 잘하는 게 더 중요하고 필요하면 병원에서 인지 기능 검사를 해보고,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좋습니다."
교수님은 머리 쓰는 일을 계속하는 등, 인지 저하를 예방할 수 있도록 앞으로 관리를 잘하라는 의미로 말씀해 주셨지만 저는 그 보다 방사선 치료로 인지 기능이 저하되었을 수 있다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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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검사소에 다녀오고 기분이 급 다운되었습니다.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침울한 기분으로 스마트폰을 켰습니다. 그때 포털 사이트의 첫 화면에 뜬 추천 콘텐츠가 눈에 들어왔어요.
'지하철 승객을 울린 기관사의 안내 방송 "승객 여러분, 잠시 창문 밖을..." ' 이란 제목의 블로그 글이었어요.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는 지하철에서 바라본, 강변도로의 저녁 풍경이 담긴 사진이 먼저 보였고요. 이런 글이 이어졌어요.
" 안녕하세요. 저는 이 열차의 기관사입니다. 고객 여러분, 잠시 시간을 내어 창문 밖을 바라봐 주시겠습니까?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도 좋지만 저는 한강 양 끝을 따라 달리는 수많은 자동차들의 불빛을 보곤 합니다.
아마도 운전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차에서 빛나는 불빛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모르고 있겠죠?
이것이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멀리서 보는 사람은 우리의 빛을 느껴도 정작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또한 저 빛나고 있는 차량들의 불빛처럼 언제 어디서나 늘 반짝이고 있는 존재라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대단히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오평선 작가의 <꽃길이 따로 있나, 내 삶이 꽃인 것을> 이란 책을 소개하는 출판사의 블로그였어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죠. 건강해야만 반짝이는 것이 아니고, 기억력이 좋아야 반짝이는 것도 아니죠.
나는 여전히 빛나는 존재입니다.
고마운 글을 적절한 때에 접했어요. 머릿속에 잘 넣어두려고 해요. 그래도 혹시 잊을 수 있으니, 스마트폰 노트 앱에도 잘 담다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짐해 보았습니다.
'빠져나간 기억만큼, 반짝이는 추억을 만들어서 다시 채워 넣자.'
� '나는 반딧불'이란 노래 아시나요? 중식이란 가수의 노래인데요. 이런 가사로 시작합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