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한 친구가 번개를 쳤습니다. 단톡방에 글을 올려, 느닷없이 오후에 미술 전시를 보러 가자고 했어요. 주말에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이고, 함께 미술관에 가보는 건 아예 처음이었죠. 세 친구에게 계획에 없던 이벤트가 펼쳐졌습니다.
사전 준비 없이 찾아간 미술관에선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치 미술가로 꼽힌다는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어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작가였어요. 게다가 관객 마음대로 즐기면 된다는 작품들은 난해하기 그지없었어요.
'아무 데서나 시작하셔도 됩니다. 시작도 끝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라는 안내처럼, 동선도 없는 전시장에선 - AI로 만들었다는 알아들을 수 없는 기계음이 사방에서 들리고, 조명이 불규칙하게 켜졌다 꺼졌다 했어요. 어느 작품 앞에서는 관객들 사이에 있던 평상복의 무용수가 갑자기 춤을 추었고, 공중에는 물고기 모양을 한 알록달록 예쁜 색깔의 헬륨 풍선이 떠다녔어요.
엉뚱했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디오 가이드도 없었기에 궁금함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어요. 주위에 서 있는 진행 요원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는데, 돌아오는 답변 역시 애매모호했어요.
"궁금하신 건 작가 분에게 이메일로 문의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답장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좀 더 돌아보다가, 녹아내리고 있는 눈사람을 발견했어요. 제가 간 시간엔 절반 가까이 녹아 일부 형체만 남아 있었죠.
'허무함 아니면 인생의 덧없음, 이런 걸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이런 일차원적인 해석을 하던 중에 벽면 구석 조그만 안내 글을 통해, 이 작품의 이름은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매일 새로운 눈사람을 가져다 놓고, 녹아가는 모습을 전시한다는 이 작품에는 이런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어요.
'작가는 이미 벌어진 이벤트 그 이후의 시간, 또는 앞으로 벌어질 이벤트 직전의 시간을 다양한 매체로 탐구해 오고 있다.'
그 후, 다른 작품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이 문장만 뇌리에서 맴돌았어요.
'이미 벌어진 이벤트 그 이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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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를 다녀온 며칠 후, 변종하라는 또 한 명의 미술가를 알게 되었어요.
그는 '조선의 돈키호테'로 불리던, 1980년대 한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화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몸의 일부가 마비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가는 몸을 지탱하거나 손을 움직이기도 힘든 제약 속에서도, 그 후 13년 간 자신의 불편한 몸을 그린 자화상 129점을 남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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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며 다양한 이벤트를 만나게 됩니다.
그 이벤트는 축복받는 결혼식처럼 꿈꾸던 일 일수도 있지만, 암 판정이나 뇌경색 같은 원하지 않는 일 일수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