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화
냉장고 문을 열어 얼음 트레이를 꺼냈다.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분명히 어제 퇴근 전에 정수기 물을 채워 넣었는데 그사이 사람들이 홀랑 다 먹어 버린 것이다. 나는 오늘도 얼음 제조 담당이 되었다. 남들은 너무나 쉽고 편하게 마시는 아이스커피를, 나는 노동을 해야만 마실 수 있었다.
사실 얼음에 신경 끄면 그만이었다. 얼음 제조 담당자가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만약 단 하루라도 얼음 트레이가 비어 있다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나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내가 트레이에 물을 채워 넣기 전까지 얼음은 만들어지지 않겠지. 결국 같은 층에 있는 모든 직원들은 이번 여름이 끝날 때까지 아이스 음료를 먹지 못한 채 나를 원망할 것이다.
나는 이 회사의 ‘막내’다. 막내는 언제 어디서나 좀 특별한 존재였다. 회의실에 누군가 먹고 놓아둔 과자 껍질을 치워야 했고, 에어컨 리모컨의 위치를 파악해 뒀다가 누군가 덥다고 말하는 순간 잽싸게 버튼을 눌러야 했다. 프린터기에 용지가 부족해지면 채워 넣어야 했으며, 회식할 때는 날짜와 시간, 장소를 예약하고 각각의 취향에 맞춰 메뉴까지 주문해 놓아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벌레 잡는 일까지도 내 몫이었다. 한낮 사무실에 침입한 거미, 벌, 바퀴벌레까지. 막내는 눈치껏 모든 일을 다 잘해야 하는 만능이어야 했다.
더 슬픈 현실은 연차와 반차는 남의 일이라는 점이었다. 노동법에 의하면 한 달 만근할 경우 월차를 쓸 수 있었지만 내게는 사치스러운 법이었다. 잡무 때문에 본 업무에 집중하지 못해 쉬는 날 없이 일하는 것은 물론, 일주일의 절반은 야근 당첨이었다.
언제쯤 막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입사 6개월 차인 나에게는 너무나 막연하고 먼 일이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과장급 이상이었다. 나는 매일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했다. 회사를 그만두는 상상. 만약 정수기와 에어컨이 고장 났는데 내가 없다면? AS센터에 전화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겠지. 갈증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물 마시러 회사 밖으로 나가고, 업무는 마비될…….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허무한 공상일 뿐이었다. 고작 이런 일로 힘들다고 그만둔다면 책임감 없어 보일 게 뻔했다. 이직할 때 이력서에 한 줄 쓸 경력도 되지 못할 테니 최소 일 년은 참기로 했다.
오늘은 폭염 경보가 내린 날이었다. 최근 들어 연일 재난 문자 알림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이렇게 더운 날, 사무실은 최적의 공간이었다. 바깥에 나가면 습한 공기에 숨이 막히고, 조금만 걸어도 온몸에 땀이 흘렀으니까.
평소 점심시간에는 팀 사람들끼리 다 같이 나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런데 일주일 전부터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도시락을 싸왔다. 부장님 때문이었다. 밖에 나가면 덥다는 이유로 부장님이 도시락을 싸 오기 시작하자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전부 외식 파에서 도시락 파로 돌아섰다.
- 저도 도시락 싸 올래요! 안 그래도 다이어트 하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됐어요.
나도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을 하면서 도시락 파에 살며시 껴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과 반찬을 싸고, 다음날 메뉴는 무엇으로 할까 고민해야 하는 귀찮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 혼자만 개인행동을 하면 모양새가 이상할 터였다.
정오가 되자 사람들이 물품 창고 옆에 있는 테이블로 모여 앉았다. 총 여덟 명이 테이블을 꽉 채웠다.
- 역시 여름에는 회사가 최고야.
- 맞아요. 저희 집에 에어컨 없거든요. 요즘은 진짜 출근할 맛 나요.
- 아직도 안 샀어?
- 집에 있는 시간도 거의 없는데요, 뭘. 전기세도 아깝고…….
차장님과 부장님이 서로 맞장구를 쳐 가며 이야기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소리 내어 웃으며 동의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찌지직. 찌직.
그 소리는 몇 번 더 반복됐다. 처음에는 에어컨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리더니, 사람들이 침묵하자 더 크게 들렸다.
찌지직. 찌지직. 찌직.
모두 들고 있던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 이게 무슨 소리야?
- 또 그 쥐인가 봐요. 으, 더러워.
- 우리 앞으로 다른 테이블에서 밥 먹을까요?
찍찍. 찌지직.
순식간에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선배들이 시선을 나에게 고정했다. 나는 암묵적인 강요를 느꼈다. 월례회의 때마다 사장이 기도하면서 읊었던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너희 중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이는 남을 섬기는 이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픈 자는 남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이비 종교 단체에 빠진 사장은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하는 월례회의 때마다 기도를 하며 시작했다. 직원들은 사장이 읊는 성경 구절을 들으며 눈을 꼭 감고 손을 모았다. 이 회사의 고유한 전통이자 문화였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만 조용히 눈감으면 금세 지나가는 일이었으니까. 나도 처음에만 불편했지, 적응된 이후로는 아무렇지 않았다.
찌직. 찌지직. 찍찍.
쥐 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선배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은 뒤 일어나 파리채를 챙겨 물품 창고로 들어갔다. 먼지를 뒤집어쓴 박스들, 고장 난 난로와 선풍기, 망가진 파티션, 색 바랜 현수막……. 물품 창고가 아니라 쓰레기 창고나 다름없었다. 관리하는 담당자가 없으니 당연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기만은 누가 시키기 전까지 절대로 정리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창고에서 부지런히 쥐를 찾는데, 열린 문틈으로 선배들이 언뜻 보였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도시락을 먹으며 떠들어 댔다. 쥐에 대해 더는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선배들은 내가 창고에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듯 보였다. 나는 물품 창고 안을 구석구석 살피며 최대한 쥐 소리에 집중하려 애썼다.
찍찍. 찍. 찌지직.
주변을 꼼꼼히 살피는데 구석에서 검은 형체가 어른거렸다. 나는 파리채를 꼭 쥐고 검은 형체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내가 발을 움직인 순간 검은 형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바깥에서 떠드는 소리도 함께 멈췄다. 고개를 돌려 문틈을 보았다. 선배들이 점심을 다 먹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