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by 최용훈

늦더위가 끈질기다. 더위 먹은 국화꽃을 뽑아버린 화훼농가의 타들어가는 마음과, 여전히 붉은빛을 띠지 못한 사과를 바라보는 농부의 눈길이 안타깝다. 이젠 계절의 변화도 무색해지고 만 것일까? 온실효과니 기상이변이니 하는 얘기들이 온몸으로 체감된다. 여름이 더디면 가을이 짧겠지. 그러면 일순간에 추운 겨울이 다가서겠지. 더위도 싫지만 추위는 더 싫은데... 삶이 추운 사람들에게 날씨마저 추우면 사는 것이 얼마나 힘겨울까.


9월 중순에 폭염주의 경보를 받으면서 갑자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가을이 실종됐다. 마치 이 더위의 끝이 겨울과 닿아있는 느낌이다. 여름, 겨울과 어울려 사계를 이루고 얼마 후면 봄이, 가을이 오리라 위안을 얻던 그 계절은 이제 서서히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말처럼 늦더위의 더딘 걸음은 가을이 와도 가을 같지 않을 것 같다는 조바심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른 새벽과 늦은 저녁에 간간이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더위에 묻힌 가을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가을과 함께 새겨졌던 그 무수한 기억들도.


가을, 초록의 논이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풍경을 마주하면 왠지 어린 시절 설탕 통 속에 가득 담겼던 구슬 생각이 난다. 그 풍성한 뿌듯함과 더불어 옆집 친구와의 홀짝놀이에 구슬 한통을 통째로 걸었다가 몽땅 잃고만 어린 시절의 기억. 나 자신의 허탈함이나 상실감보다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동생의 애처로운 눈길이 더 생생하다. 동네 어귀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서늘한 바람이 어린 두 형제의 등 뒤로 불고 있었다. 나의 기억 속에서는.


가을이 오면 나는 왠지 텅 빈 쓸쓸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곤 한다. 왜일까? 서늘함 속의 한기(寒氣)일까? 홀로 낙엽을 밟아야 하는 외로움일까? 그래서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라고 노래하는 것일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것은 늦여름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없이 맞이했던 첫 가을. 그것이 나의 가을이었다.


함께 걷던 길

불현듯 혼자임을 깨닫고 보니

가을이다

훌훌 가벼워지고 싶어

바스락,

낙엽 한 잎 밟은 것뿐인데

가을이다.


박금숙 시인의 ‘가을’이라는 시 속의 한 구절이다. 어느 순간 되돌아보니 함께 하던 그 길에 나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 같은 계절.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에 흠칫 멈춰서는 계절. 그 가을이 조금은 늦어지는가 보다. 그런들 뭐 어떻겠는가. 오래서 올 것도, 가라 해서 갈 것도 아닐 터인데. 때 되면 오고, 또 갈 텐데. 그것이 세월이고 계절이고 인생이겠지.


가을은 모든 것을 놓아줌으로 아름답다. 겨울의 고요, 봄의 환희, 여름의 열정을 모두 버리는 계절, 그 모든 것을 놓아주고 빈손으로 홀로 걷는 계절. 그래서 가을이 아름다운 건가? 카뮈(Alnert Camus)의 말인가 의아했던 한 구절. “가을은 모든 잎사귀가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 아! 그래 잊고 있었다. 떨어지기 전, 떨어진 후에라도 꽃처럼 아름다운 가을의 나뭇잎을 잊고 있었다. 잎은 잎이고 꽃은 꽃이라서가 아니고 분명 꽃처럼 아름답기에 소중한 저 잎, 저 낙엽들...


인생의 가을에서 나는 잎을 떨군다. 가을 들녘을 홀로 걸으며 떨어진 잎을 밟는다. 그리고 저 언덕 너머로 스러지는 붉은 석양을 바라본다. 아! 가을. 아름다운 인생의 가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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