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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Sep 13. 2020

모더니즘 소설가들 (2)

버지니아 울프와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20세기 가장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였다. 그녀의 대표작인 ‘등대로’(To the Lighthouse, 1927)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가장 최초로 사용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유한 문학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버지니아는 당시 런던의 블룸스베리 지역에 모여 살고 있던 일군의 작가, 철학자, 예술가들의 모임인 ‘블룸스베리 그룹’(Bloomsbury Group)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이 지식인들은 획일성에 반기를 들고, 유미적 즐거움을 강조하였으며 개인적인 자유를 추구하였다. 그녀는 생전에 영국 문단에서 뛰어난 작가로 인정을 받았으나 개인적인 삶은 불행했다. 평생 조울증에 시달렸으며 결국 1941년 59세의 나이로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였다.  

  울프의 작품은 유미주의, 페미니즘, 독립성 등으로 규정할 수 있다. 특히 모더니즘의 경향을 강하게 반영하였다. 그녀의 가장 실험적인 작품 ‘등대로’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의식의 흐름으로 대체되었는데, 작품의 절반이 어느 날 한 오후에 할애되고 있으며 이후 10년 동안의 일들은 불과 열 개 남짓의 문단에 압축되어 표현되기도 하였다. 이는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었다. 당대의 많은 독자들에게 있어 그녀의 작품들은 어렵고 특이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언어가 난해하고 작품의 구조도 일정한 형태를 지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등대로’라는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행동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거의 모든 것이 그들의 마음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가운데 ‘자기 자신의 방’(A Room of One's Own)은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여성 연사가 ‘여성과 소설’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는 극적 수필(dramatic essay)이라 할 수 있다. 그 강연의 주제를 이루는 논문을 울프가 제출하고 그 내용이 연사의 정신 속에서 극적으로 묘사되는 형식이다. 그 논문의 내용은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 자신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A woman must have money and a room of her own if she is to write fiction.)라는 것이었다. 이 수필은 18세기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의 ‘여성 권리의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1792)와 더불어 이후 페미니즘 운동의 지침서가 되기도 하였다.  


제임스 조이스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소설가는 역시 제임스 조이스였다. 아일랜드 출신의 그는 모더니즘의 전위예술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인식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편 소설집인 ‘더블린 사람들’(Dubliners, 1914),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1916), ‘율리시즈’(Ulysses, 1922),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1939) 등이 있으며 세 편의 시집을 내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율리시즈’는 에즈라 파운드의 도움으로 한 잡지사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외설이라는 비난과 함께 연재가 중단되었고, 당시 상당한 사회적 논란을 야기하였다. 수차례에 걸쳐 출판업자들에 의해 출판이 거부되었던 이 작품은 1922년 마침내 책으로 빛을 보게 되었으나 미국으로 보내진 책들이 파기되고 불살라지기도 하는 등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2년은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함께 엘리엇의 ‘황무지’가 출간됨으로써 모더니즘의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써진 '율리시즈'는  1904년 6월 16일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 (Odyssey)의 주인공인 ‘율리시즈’(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를 제목으로 삼은 이 작품에서 유태인 광고 담당자인 레오폴드 블룸(Leopold Bloom)은 율리시즈처럼 대서사적인 탐험 여행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인 탐험이었다. 18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각 장은 단지 한 시간의 흐름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즉 아침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두 시까지의 정신적 여행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장에서 ‘오디세이’에 나오는 율리시즈의 에피소드들이 패러디되고 있으며 각 장은 특정한 색채, 예술과 과학, 신체의 기관과 연계를 이루고 있다. 조이스는 이 작품 속에서 다양한 관점, 내적 독백 등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모더니즘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율리시즈’ 역시 난해한 문체, 수많은 함축적인 문장과 은유들로 이름난 작품이다. 조이스 스스로도 율리시스에 대해 “나는 (율리시스) 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춰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I've put in so many enigmas and puzzles that it will keep the professors busy for centuries arguing over what I meant, and that's the only way of insuring one's immortality.)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 작품은 모더니즘의 대표적 소설일 뿐 아니라 실험적인 현대 소설의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작품 속의 6월 16일을 ‘블룸스데이’(Bloomsday)로 명명하고 기념하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를 기념하는 ‘블룸스데이’에 아일랜드 사람들은 ‘율리시즈’에 나오는 구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도망치지만 결국 자신과 부딪히게 되는 당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돌아가는 가장 먼 길이 집으로 향하는 가장 짧은 길이다.”

Think you're escaping and run into yourself. Longest way round is the shortest way home.     


  과연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하는가. 매일의 삶이 피할 수 없는 수렁처럼 아가리를 드러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애써 용케도 요리저리 피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결국 나 자신의 유한한 존재와 마주치게 되며 한숨짓는 것이 아닐까? 먼 길을 돌아왔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내가 선 자리는 출발했던 그 자리이다. 긴 인생길 살아봐야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임을 깨닫는 이유이다.   


“모든 삶은 여러 날, 하루하루에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헤치며 걸어가 강도들, 유령들, 거인들, 늙은이들, 젊은 사람들, 아내들, 과부들,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들을 만난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스스로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Every life is in many days, day after day. We walk through ourselves, meeting robbers, ghosts, giants, old men, young men, wives, widows, brothers-in-love, but always meeting ourselves.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고, 웃고, 웃으며 사랑하고 증오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 세상 떠나는 날, 그때 마주치는 사람은 언제나 나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생의 끝은 홀로 남겨진 외로움으로 가득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뒤돌아보는 우리의 삶은 아스라한 그리움을 남긴다.       


  세 권의 시집을 발표한 조이스는 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시는 가장 환상적으로 보이는 때조차도 언제나 인위적인 책략에 대한 반란,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에 대한 반란이다. 시는 현실임을 알아보는 단순한 직관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환상적이거나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는 종종 시대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만큼 기억의 자손들에 의해 꾸며지는 역사를 무시한다.” (36)  

  

  조이스에게 있어 시는 인위적인 모든 것,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과거의 역사에 저항한다. 하지만 시는 단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현실을 외면한 사람들에게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과거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만 환상일 뿐이다. 그래서 ‘율리시즈’에서 이렇게 말한다. “스티븐은 말했지. 역사란 깨어나고 싶은 악몽이라고.”(History, Stephen said, is a nightmare from which I am trying to awake.) 하지만 그에게 있어 시는 하나의 꿈이었다. 영혼을 깨우는 꿈. 여기에 조이스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이슬에 젖은 꿈에서, 내 영혼이, 솟아오른다.

사랑의 깊은 꿈에서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하! 나무들은 한숨으로 가득 차고

나뭇잎들은 아침을 꾸짖는다.     

동쪽으로 서서히 새벽이 번지고

부드럽게 타오르는 불들이 나타나

회색과 황금색의 거미줄로 만든

저 모든 베일을 떨게 한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은밀하게

꽃향기 나는 아침 종들이 흔들리고

요정들의 지혜로운 합창이

들리기 시작할 때 (수도 없이).  (37)


English Texts :


By James Joyce    

“Poetry, even when apparently most fantastic, is always a revolt against artifice, a revolt, in a sense, against actuality. It speaks of what seems fantastic and unreal to those who have lost the simple intuitions which are the test of reality; and, as it is often found at war with its age, so it makes no account of history, which is fabled by the daughters of memory.” (36)    


From Dewey Dreams, My Soul, Arise 

                                by James Joyce    


From dewy dreams, my soul, arise,

From love's deep slumber and from death,

For lo! the trees are full of sighs

Whose leaves the morn admonisheth.       

Eastward the gradual dawn prevails

Where softly-burning fires appear,

Making to tremble all those veils

Of grey and golden gossamer.       

While sweetly, gently, secretly,

The flowery bells of morn are stirred

And the wise choirs of faery

Begin (innumerous!) to be heard.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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