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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Mar 18. 2021

꽃과언어, 그 미묘한 콜라보

문덕수, 꽃과 언어

꽃과 언어

         문덕수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Flower and Language

                by Moon, Duk-soo    


When a language touches a petal

It becomes

A butterfly.     


The language

Is flying like a flag

Whose sound and meaning is torn apart.

And then it falls.     


Even when the language around the flowers

Rushing in like the flowing tide

Bursts into flame

And finally goes out,     


A certain language,

Touching a petal, becomes

A bee.    


문덕수 시인의 ‘꽃과 언어’를 읽을 때마다 나는 시인의 언어를 생각합니다. 문 시인은 시 속에서 언어를 나비, 찢진 깃발, 밀물, 타버린 불꽃, 꿀 벌 들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은유의 언어들은 모두 한 송이 꽃 주위로 모여들지요. 우리의 마음에 꽂히는 수많은 시적 이미지를 ‘꽃’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묘사한 것은 놀라운 단순성과 함께 강력한 상징성을 보여줍니다. 꽃을 보고 심상이 떠올라 시를 지을 때,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언어입니다. 언어는 나비가 되고 꿀벌이 되어 독자들의 마음으로 날아듭니다. 가끔 시 속의 언어는 소리와 뜻을 잃고 무의미한 나열만을 계속하고, 그 심상 언저리를 넘어 밀물처럼 몰려온들 허공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살아난 하나의 언어, 하나의 표현이 꿀벌처럼 우리를 쏘기도 하고, 때론 달콤한 넥타로 목을 간지럽히기도 합니다. 누군들 알겠습니까? 어떤 언어가 누구의 가슴을 적시게 될지. 그래서 시심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시가 불러낸 언어를 소중히 사랑해야 합니다.     


‘시는 쓰는 순간에는 하나님과 시인만 그 뜻을 알다가, 쓰고 나면 하나님만이 안다.’라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그렇게 막연하고 사변적일 수 있다는 얘기죠. 하지만 시의 힘은 아무리 관념적이어도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가슴 시린 사실적 공감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규칙과 규범 질서를 중시했던 고전 시대에, 시는 훈련받은 기술자들만이 쓸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시에 사용되는 시어까지 정해져 있었죠. 형식과 규율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탓이었습니다. 낭만주의는 이런 규칙과 규범을 넘어선 자유로움을 추구했죠. 시인의 개성과 독창성으로 시어가 탄생했습니다. 워즈워스의 말대로 시는 ‘감정의 자발적인 흘러 넘침’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천재이어야 했고, 예언자이어야 했습니다. 20세기 신비평의 주창자였던 T. S. 엘리엇은 그러한 낭만주의의 시적 자발성이 감정과 이성을 분리시키는 ‘감수성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객관적 상관물’이란 개념이었습니다. 수많은 시론과 주장들 속에서도 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창조한 시어로 우리를 미묘한 감성의 골짜기로 안내합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어떤 이의 순간적 시심이 버무려 놓은 한 편의 시가 누군가에게 거대한 감동으로 다가올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씁니다. 시를 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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