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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May 29. 2021

물같이 흐르는 시

이지현, '잊었다는 말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잊었다는 말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이지현     


가볍게

가볍게

물결 위에 떨어지는 꽃  이파리처럼

아아, 잊었다는  말은

그렇게 가벼운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새벽녘 이슬 밟고 가는 달그림자처럼

저물녘  풀잎 스치는 해지는 소리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잊었다는 말은  그렇게 해야 한다.    


때때로 우리 삶은

시든 가을 길을 걷듯  발이 무겁고

흰 눈 지고 가듯 어깨가 무겁지만

그래도  살아볼 만하지 않던가.    


꽃 진 자리 새로이 꽃이 피듯이

강물 흐른  뒤 뒤따라 온 강물 채워지듯이

또 다른  사랑이

언 손을 녹여주지 않던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예의와

다가올 사랑에 대한 겸손으로

잊었다는 말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You should say you forgot in a soft voice

                            Lee, Ji-hyun


Softly

Lightly

Like petals falling on water

Ah, you should speak

You forgot

In such a soft voice.    


With a casual look

Like the shadow of the moon flowing on dews at dawn

Like the sound of the sun setting through the grass in the evening

You should say you forgot in such a way.    


Sometimes our life goes

With heavy feet treading on the desolate autumn path,

With a shoulder heavy with white snow

But is it worth living?    


Just as flowers bloom where they fall

Just as the flowing river is filled with the following river,

So another love

Melts your frozen hands.    


As a courtesy for the past love,

With humbleness for the coming love,

You should say you forgot

In a soft voice.


이지현 시인의 시는 흐르는 물 같다.  어떠한 모양으로도 막힘 없이 흐른다.  흙과 모래를 만나면 스며든다. 그의 시는 그렇게 조용히, 가볍게 흐른다. 언어의 물이 감성의 강을 따라 굽이굽이 이성의 바다로 흘러간다. T.S. 엘리엇이 말한 감수성의 통합을 이루면서도 빅토리아 시대의 영시가 주는 고전적인 우아함이 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움직임은 그렇게 자연스럽다.


이 시인의 시는 고요하다. 내면의 흔들림과, 때론 타오르는 열망과 그리움이 얼음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아픈 침묵을 헤집는다. 하지만 어느 구석이고 불편함이 없다. 그는 시의 요체가 언어임을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숙련된 목수가 연장을 능란하게 구사해 깎고, 자르고, 문질러 빛을 내는 것처럼 언어를 고르고, 다듬고, 적절히 배치한다. 그의 시는 바로 언어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함께 떠가는 감성과 이성의 손잡음이다.


시는,  잊었다는 아픈 감성을 가볍게 말하라고 한다. 흐르는 물 위로 떨어지는 꽃잎처럼 그렇게 무심히, 흐르듯 말하라 한다.  무거운 발을 이끌고, 지친 어깨로 걸어간다 하더라도, 무수한 방망이질 끝에 제련된 쇠처럼 어려운 세상에서도 살만한 가치를 찾으라고 한다. 애써 잊는다는 고통을,  흘러도 다시 채워지는 강처럼, 또다시 피어나는 꽃처럼,  새로운 사랑처럼,  보내라 한다. 그리고 가볍게 낮은 목소리로 잊었다 말하라 한다. '가볍게, '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라는 역설은 마지막 연의 '예의'와 '겸손함'으로 해소되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은밀한 기대와 설렘으로 여전히 긴장은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아, 잊었다는 것은 가볍게 말해야겠지. 슬프고 심각한 표정은 지워야겠지.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버텨야겠지. 그리고 다가올 사랑을 다소곳이 기다려야겠지. 시인은 그렇게 되기를 꿈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의 시는 이지현 시인의 시집 '그리운 건 너만이 아니다'(2011)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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