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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un 17. 2021

역사라는 현실과 문학의 은유

김춘수 :  메시지

메시지

        김춘수     


아우슈비츠, 

그날로부터 아무도 서정시는 

쓰지 못하리.

르완다에서는

기린이 수천 마리나

더 이상 뻗을 곳이 없어

모가지를 하늘에 묻었다고 한다.    


Message 

       Kim, Choon-soo     


Auschwitz,

From the day on,

No one could write any lyrical poem. 

In Rwanda, 

Reportedly, thousands of giraffes

Bury their necks in the sky 

As there is no place to stretch them.     


인류의 역사는 왜 그렇듯 폭력과 증오로 가득한 것일까? 인류가 집단을 이루고 살아온 그 오랜 세월 동안 이 지구 상에 전쟁이 없었던 날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렇게 인간은 같은 인간을 증오하고, 박해하고, 학살해왔던 것이다. 성경에 그려진 인류 최초의 살인은 형 카인에 의한 동생 아벨의 죽음이었고, 카인은 아벨의 소재를 묻는 하나님의 음성에 ‘그걸 내가 어찌 압니까. 내가 아벨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라고 소리쳤다. 그 이래 인간은 권력을 위해, 영토와 재물을 위해, 스스로의 자만심을 채우기 위해 무수한 인간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7-80년 전, 인류 최악의 지배자 히틀러가 등장해 ‘인종청소’라는 사악한 구호 아래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에서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아리안족이라는 허구의 망상에 기초해 게르만족에 대한 과도한 자만심으로 인류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고, 전쟁을 통해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그는 미치광이에 다름 아니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배하는 지구라는 혹성에서 인종과 종족의 구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국가와 국경은 분열과 대립의 상징일 뿐인가? 민족주의나 국가 지상주의의 국수(國粹)적 사상이 인류애라는 보편의 가치에 앞서는 세상에서 구원과 사랑의 빛은 찾을 수 있겠는가.     


불과 27년 전인 1994년 아프리카의 한 작은 나라 르완다에서 벌어진 집단학살 역시 한 종족의 다른 종족에 대한 경멸과 증오에서 비롯되었다. 불과 3개월 만에 50만에서 백만에 이르는 무고한 시민이 학살되었던 당시, 타임스의 헤드라인은 이랬다. “지옥에는 악마가 없다. 르완다에 있다.” 더구나 이 종족의 학살에는 종교적 갈등까지 개입되었다 하니 인간을 살리고자 존재하는 종교마저도 인종적, 종족적 갈등으로 변질되었단 말인가.      


시인은 20세기의 두 사건을 통해 서정적인 시심(詩心)의 실종, 그리고 아프리카의 열대 초원을 달리던 사슴마저 하늘에 머리를 묻었다는 은유로 역사와 시대의 굴곡, 그리고 그 아픔과 두려움을 시 속에 담아내고 있다. 그렇듯 시는 시대의 감정을 포착해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흔들리는 인류에 가장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역사는 범죄와 불행의 기록일 뿐이다.”라는 볼테르의 말을 떠올리며 역사의 객체일 뿐인 무기력한 군중들은 문학을 통해, 시를 통해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되새긴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보다는 미래의 꿈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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