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재임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나야. 몸은 괜찮지?”
도형은 문을 열고 들어가며 물었다.
도형은 진심으로 재임을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제는 두통도 거의 사라지고….”
도형은 재임이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행이다. 이제는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
아마 미국 대통령만큼이나 영향력이 있을걸? 아니다 미국 대통령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신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몸 관리도 잘해야지. 이 중요한 사람을 이 초라한 병실에 가두어두다니 좀 너무한 데.”
도형은 하고 싶지 않은 농담을 했다.
“농담하지 마세요. 전 이 세상에서 가장 관심 없는 존재였어요. 내가 죽거나 사라져 버려도 이 세상 사람 아무도 알지 못했을 거예요.
이 세상 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찾아 와 주셔서...”
재임은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괜히 조용히 지내는 사람을 내가 이렇게 정신없게 만든 거지.”
“틀린 말은 아니네요.”
재임의 표정은 약간 밝아졌다.
“지금도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어요. 저는 어딜 가더라도 선생님과 함께 할 거예요.”
“난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사람이야. 내 아내가 여기 이렇게 누워있으니.”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것 같으세요? 선생님 생각으로는요?”
“그거야 모르지. 아마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서재임을 만나고 싶어 하겠지. 신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신을 설득하려 할 거야.
지구의 생명을 그대로 놓아 달라고. 아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수십억 명의 사람 중에 만 명밖에 죽지 않았으니. 물론 만 명도 적은 수는 아니지만.”
“과연 신이 인간들에게 설득당할 수 있을까요?”
재임이 진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누가? 신이?
난 전혀 모르지. 오히려 네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저도 당연히 모르지요. 하지만 인간에게 설득당해서 생각을 바꿀 거 같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하지도 않았겠지요.
마치 그렇게 하는 게 세상의, 아니 우주의 이치인 것처럼 이야기했으니까요.”
“그렇겠지. 명색이 지구의 신인데 함부로 바뀔 수도 있는 말을 꺼냈겠어?”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요? 물론 3년밖에 남지 않았지만요. 지구 사람들이 남은 3년을 행복하게 보내야 할 텐데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겠지. 물론 아닐 수도 있고.
3년 안에 핵전쟁이 일어나서 3년이 되기도 전에 먼저 멸망해 버릴 수도 있겠지.
지구의 종말을 다룬 영화 같은 거 보면 인간 세상이 완전 혼란에 빠져버리잖아. 하여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은 사실이지.”
“선생님 생각은요?”
“내 생각? 내 생각은 말이지.”
도형은 미소를 지으며 잠깐 이야기를 멈추었다 말을 이었다.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3년을 살다가 두려움이나 후회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
아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며? 온 인류가 서로 화합하며 사이좋게 지내 온 역사는 한순간도 없었으니까.
그게 진짜 신이 바라는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야. 그동안 수많은 철학자가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왜 살아가는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인간이란 그저 네가 말한 신의 생명 에너지를 키워주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게 좀 허무하지 않아?”
“원래 인간은 의미 없는 존재 아니었나요? 그나마 생명 에너지라도 키우는 역할을 한다는 게 다행 아닌가요?”
“뭐, 그렇게 생각하면 속 편하긴 하겠다. 그래도 한 가지 의문이 풀리긴 했어.
왜 생명체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그토록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서 노력하는지 궁금했거든.
단지 이기적 유전자 때문이 아니라 생명 에너지를 늘리기 위한 신이 주신 본능 때문이라는 거잖아.”
“ 그렇게 생각하면 좀 허무하긴 하네요.” 재임이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재임이 갑자기 주제를 바꿨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요 선생님이 지금 쓰고 계신 소설이요?”
“내 소설? 갑자기?”
“네. 선생님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예요. 선생님의 소설이 완성되더라도 이제 시간이 3년 밖에 없으니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없을 테니까요. 선생님이 소설에서 하고 싶은 얘기가 궁금해요.”
“글쎄. 그렇지 않아도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어. 어차피 이제 인류가 3년밖에 살 수 없는데 나의 소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그렇다고 글 쓰는 일을 접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요. 선생님이 쓰시고 싶은 내용이 뭔데요? 지난번에 저에게 현대 문명이 발견하지 못한 아마존 원시 부족 이야기라고 하셨어요.”
“와 기억력 좋은데.”
“듣고 싶어요.”
재임이 도형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냥 좀 궁금했어. 만약 원시시대부터 인간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다면 역시 같은 방식으로 지금처럼 이어져 올까 하고.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소설가들도 많이 있었고 비슷한 글도 많았지만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만일 내가 인류의 지도자이고 모든 사람이 내 말에 따라 살아간다면 난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까 하고 말이야.”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우선 인간을 정확하게 알아야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지.
아주 오래전부터 수많은 철학자가 인간에 대하여 연구를 해왔고, 지금은 과학자들이 인간의 뇌를 자세하게 연구하고, 또 수많은 심리학자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해도 결론은 없잖아. 모두 인간의 부분들만 설명하고 있으니.”
“인간 개개인이 모두 다르기 때문 아닐까요?”
“물론 다 다르긴 하지. 내 생각에는 인간들이 다른 이유는, 인간들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해.
세상 지식의 아주 극히 일부분만 알고, 또 아주 작은 부분만 경험하고 살기 때문일 거야.
사람들은 자신의 뇌를 너무 신뢰하거든. 그래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들끼리는 생각이 다르지 않을걸?”
도형은 자신이 약간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얘기가 다른 데로 갔네.
하여간 내가 소설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그것 알려주고 싶을 뿐이었어. 아니다 나도 진리를 아는 건 아니니까. 그냥 그런 것을 생각해 보라는 목적이었지.”
“인간이 더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을 쓰시려는 거군요?”
재임은 감탄하듯 말했다.
“그렇지. 물론 내 생각은 틀릴 수밖에 없겠지. 내가 천재는 아니니까.”
도형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존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인간 집단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쓰시는 거예요?”
“아니 그 반대야. 그곳에서도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삶은 추구하고 고민하는 원시 부족의 한 청년 이야기.”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야.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한 소설에, 또 재미있게 담으려고 하는 게 너무 무리인 것 같기도 하고.”
“제일 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만 쓰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야겠지. 하지만 사실 무슨 이야기를 제일 하고 싶은지 나도 잘 모르나 봐. 그래서 이 얘기 저 얘기 주절주절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이 세상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이야기를 쓰고 싶은 거예요?”
“나에게 그럴 능력은 없지. 다만 내가 생각해 낸 것처럼 쓰는 거지. 그냥 써 보려고 해. 그냥 누워있는 아내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가 도움을 좀 드리고 싶지만….”
“너는 현실적으로도 내게 굉장히 중요하지만, 나의 소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사람이야.”
“제가요?”
“당연하지, 온 인류의 역사와 지식을 다 가지고 있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면서 또 외계인의 삶까지 내게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네가 신에게 들은 이야기만 책으로 쓰기만 해도 당장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사서 읽을걸?”
“고시원에서 벌레처럼 살아가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주목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신기한 일이지.”
“이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세상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해야 할지는 신께서 잘 알려주실 거야.
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지 않나?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백을 가지고 있으니, 뭐가 걱정이야?”
“신의 소리를 언제까지나 들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당장 신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모든 사람이 사기꾼이라고 할 텐데요.”
“그럴 리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걱정하는 건….”도형은 이야기할까 말까 망설이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뭔데요?” 재임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놀랄 필요는 없어. 그냥 혹시 너를 해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까 봐.”
“저를 해친다고요? 왜요?”
“지금 서재임만 사라져 버리면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평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걸?”
“그렇다고 신의 계획이 달라지지는 않잖아요.”
“그건 상관없는 일이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다가 갑자기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 그런데 왜 당신의 신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시간을 알려준 걸까?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괜히 혼란만 만드는 일을.”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준다고 하잖아요.”
“내가 보기에는 신도 아마 궁금해하는 것 같아.”
“뭐를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지구인들의 행동이.”
“인류 역사의 모든 인간 모습을 보아온 신이 그것을 모르겠어요?”
“그렇겠지. 당연히 인간들이 혼란스러워하며 자신들을 죽이지 말라고 아우성칠 것을 알 텐데 왜 그런 말을 전하라고 하는 걸까? 제발 좀 신께 물어봐 줘봐.”
도형은 약간 답답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어요.”
“참 또 한 가지 생각 난 게 있는데….”
“또 뭐죠?”
“그 텔레파시 말이야.”
“네.”
“그건 어떤 식으로 의사소통하는 거야? 예를 들면 음….”
도형은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이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예를 들면 그냥 언어를 전달해 주는 거야 아니면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해 주는 거야?”
“갑자기 생각 난 게 그거예요?”
재임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지금 뭔가 설명하기가 어려워 한참 생각한 것처럼 언어는 한계가 있잖아.
그래서 원하는 생각이나 마음을 전달하는데 매우 부족한 전달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 물론 다른 방법이 없긴 하지만.”
“물론 언어는 한계가 있죠.”
“그래서 현대 철학자들은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그 공백을 메워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같거든.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글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설명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매일 해.”
“그래서 예수님은 은유로 많은 말씀을 하셨잖아요.”
“물론 그렇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 이중 삼중의 메타포를 써도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것들이 생기거든. 물론 능력 부족 때문이겠지만.”
“그래서 텔레파시를 쓰면 원하는 모든 것을 다른 이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느냐를 물어보시는 거죠?”
“그렇지.”
“당연히 인간의 언어보다는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죠. 심지어는 내가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까지 전달할 수 있어요.
물론 전달하려는 사람 마음이죠. 언어보다도 더 간단하게, 마치 사람들이 말이 안 통할 때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텔레파시를 보낼 수도 있고요, 또는 아주 자세하게 심혈을 기울여서 전달하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거의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텔레파시로도 거짓말을 할 수 있어?”
“당연히 있죠. 말 보다 훨씬 속아 넘어가기 쉽죠.”
재임은 또 자신만의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신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는 아니죠?”
재임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을 테고.”
그때 도형은 자신이 들고 있던 전화 소리에 놀라 들고 있던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처음 재임 보았을 때 재임의 목소리에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렸던 생각을 했다.
도형은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며 재임을 쳐다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도형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전화를 끊었다.
“누구예요?”
“대통령실이라네.”
“대통령이요?”
“대통령은 아니고. 비서쯤 되나 봐.”
“뭐라고 해요?”
“대통령이 너를 보고 싶어 한 데. 그래서 이리로 오시겠다고.”
재임은 부담스러운 생각에 표정이 굳어졌다.
“언제요?”
“두 시간 후쯤에.”
“두 시간 후요? 그럼, 새벽 한 시가 넘을 텐데.”
재임은 벽에 걸린 사각형 모양의 벽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 뭔가 급한 일이 있나 봐. 이제는 서재임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 거야.
전 세계의 유명한 학자들이나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나도 이제 서재임 얼굴 보기 힘들어질 수도 있겠는데?”
“농담하지 마세요. 하여간 난 선생님 옆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난 아직 혼자 설 자신이 없어요.”
“그럼 안되지. 인간은 누구나 혼자인데. 혼자 설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순 있어도 언제까지 옆에 있어 줄 순 없지. 나는 또 돌봐야 하는 사람이 있잖아.”
순간 도형은 아내가 보고 싶어졌다.
“난 우리 병실로 가 있을게. 좀 쉬고 있어. 너 얼굴이 아직 완전한 컨디션이 아니라고 쓰여 있어.”
“아 그래요? 괜찮은데. 알았어요. 좀 누워있어야겠네요. 두 시간 후에 봐요.”
“그래 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