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새길>
딸들아.
암기력이 좋지 않다고 서러워 말고
기억력이 나쁘다고 좌절하지 마라.
삼대를 이은 부족한 암기력과 기억력이
또 다른 생존 능력을
향상시켜 놓았으니.
9. 저주받은 암기력에 대처하는 자세
나는 정말 이름을 못 외운다. 이름뿐만 아니라 전화번호나 얼굴도 마찬가지다. 특히 아이들의 미국 친구 이름은 들어도 들어도 자꾸 잊어버린다.
미국 남자는 짐이나 톰, 여자 이름은 앤이나 제인만 있는 줄 알았더니 요즘 미국 애들은 어나야, 이케나, 케일럽, 쉬모비 등 참 독특한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민자의 나라인만큼 전 세계 이름이 다양하게 모였기 때문이리라.
내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아이들은 친구에 대해 말할 때 일일이 부연설명을 했다. 특히 유진이는 친구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인데 꼭 이렇게 말했다.
“엄마 이케나가 말이에요. 엄마, 알죠? 이케나. 먹는 거 무지 좋아하고 샌드위치를 한입에 반이나 베 먹는다는 애.”
“케일럽, 오늘 농구 끝내줬어요. 케일럽은…… 잠깐, 그런데 엄마, 기억해요? 케일럽이라고 키 엄청 큰 애?”
이렇게 설명을 해줘야 이해하는 엄마가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 내 나름의 방법을 짜내게 되었다.
학창 시절, 암기과목을 공부할 때 쓰던 방법으로 아이들의 특징을 잡아 연상하는 것이었다.
입 큰 아이- 이큰아-이크나-이케나,
공부도 잘하고 상을 많이 받고 잘난 체 좀 한다는 어! 나야!-어나야,
케일처럼 쭉 길게 생겨서 농구대에 골인시키는 이미지의 케일럽,
투덜투덜 투덜이 그 여자애 뭐니?-쉬 뭐니?-쉬모비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그렇게라도 외워두니 더는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기억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의 이 몹쓸 기억력은 아이들에게까지 대물림되었다.
한 번은 같이 텔레비전 예능 프로를 보다가 ‘아이큐 두 자리냐?’며 놀리는 장면이 나왔다. 유진이가 질문했다.
유진: 엄마. 사람 아이큐가 어떻게 두 자리일 수 있어요?
엄마: 우리 주변에도 많을걸. 아이큐 백 넘으면 그래도 괜찮은 거야.
유진: 그럼 아인슈타인은 아이큐가 몇이에요? 네 자리예요?
현주: 아인슈타인은 우유 이름인데.
유진: 아인슈타인은 우유가 아니라 유명한 과학자야. 피부가 온통 파랗고 무섭게 생긴.
엄마, 아빠:???
아빠: 피부가 왜 파랗지? 유진이 네가 아인슈타인 동상을 봤나 보다.
유진: 아뇨. 사진 봤는데 피부가 파래요. 온통 파~아~랬어요.
유진이는 자기 말이 맞다며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코를 찡긋하면서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헤헤. 제가 헷갈렸나 봐요."
화면 속에는 유진이 말대로 온통 파랗고 무섭게 생긴 프랑켄슈타인이 있었다.
엄마는 참 이상하다. 물건도 깜빡깜빡, 내 친구 이름도 깜빡깜빡, 사달라는 과자 이름도 깜빡깜빡하신다. 엄마 머릿속은 대체 무엇이 차지하고 있을까?
엄마는 우리를 키우던 그때보다 팔순이 넘은 지금, 정신이 더 맑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다섯이나 되는 아이를 키워낸다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중노동에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까.
자식 다섯이 모두 학생이었던 그 시절, 엄마는 밤 자습 때 먹을 것까지 여덟 개의 도시락을 싸야 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인스턴트커피를 사발로 들이키는 것으로 엄마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도시락 여덟 개를 쭉 펼쳐 놓고 반찬과 밥을 담고 도시락을 싸던 그 모습은 흡사 도시락 가게 직원을 보는 것 같았다.
잠귀 어두운 자식들을 소리 질러 깨워서 아침까지 챙겨 먹이고 학교에 보내면 청소며 빨래가 산더미였다. 얼마 안 있어 막내인 내가 돌아오면서부터 우리 집 귀가 행렬은 자정까지 계속되었다. 엄마는 하루 4시간 숙면을 취하기도 힘들었으리라.
그래서였을까? (어느 정도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엄마는 한 번 외출하려면 서너 번은 다시 되돌아왔던 것 같다. 가스 불 잠그러, 지갑을 놓고 가서, 열쇠를 가지러 등등. 꼼꼼하게 메모하는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메모하는 것도 불편해했다. 어차피 어디에 메모했는지, 메모지는 어디에 뒀는지 기억을 못 했으니 메모를 하나 안 하나 별 차이가 없었을 거다.
학년 초가 되면 우리는 새로운 담임선생님 이름과 몇 반인 지를 반드시 부모님께 보고해야 했다. 당연하게 엄마는 금방 잊어버렸고, 아버지는 꼼꼼히 수첩에 기록했다. 그래서 선생님과의 면담이 있으면 그 전날, 아버지가 메모지에 반과 담임 선생님 이름을 따로 적어서 엄마에게 주었다.
어느 해인가 둘째 언니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을 위해 학교에 온 엄마는 아버지가 준 쪽지를 깜빡 잊고 안 가져온 걸 알게 되었다. 상담시간은 다 되어서 다시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중전화로 아버지께 연락해보았지만,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무작정 교무실로 찾아갔다. 교무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엄마를 보고 친절하게도 남자 선생님 한 분이 다가와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예…… 제가 딸아 담임선생님을 찾아왔는데…… 성함을 몰라서…...”
“그럼 반은 아시나요?”
“2학년 몇 반이라 카더라. 애가 다섯이나 돼 갖고 헷갈려서…… 죄송합니더.”
“괜찮습니다. 그러실 수 있죠. 그럼 따님 이름이?”
“이혜정입니더.”
“아이고. 흔한 이름이라 찾기 쉽지 않겠는데요.”
“근데. 딸아가 담임 선생님 별명을 말해주긴 했는데예.”
“잘됐네요. 그 선생님 별명이 뭐라고 하던가요?”
엄마는 주변을 둘러보고 선생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팽귄이라꼬. 걷는 폼이 딱. 아이고 제가 이래 말씀드린 거 아시면 안 되는데.”
엄마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러나 듣고 있던 선생님의 얼굴은 몇 배나 더 붉었다.
“혜정이 어머님이시군요. 제가 혜정이 담임입니다.”
엄마는 그날 상담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를 우짜꼬. 부끄러버 앞으로 우예 선생님 얼굴을 보노.”
끙끙 앓는 엄마 옆에서 두 다리를 쭉 펴고 엉엉 소리 내 울던 언니 모습이 나는 지금도 생생하다.
엄마는 사람 이름뿐 아니라 상표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특히 우리나라 말이 아닌 것은 더했다.
“엄마 장 볼 때 꼭 빠삐코 사서 와. 꼭.”
“뭐라꼬? 그게 뭔데?”
“아이스크림이야. 쭉쭉 빨아먹는.”
“알았다. 기억나면 사오꾸마.”
“아이. 기억나면이 아니라 꼭 사 와야 해. 명화극장에서 본 빠삐용 생각나지? 엄마가 그 사람 불쌍하다고 했잖아. 그 빠삐용하고 비슷한 이름이야. 알았지?”
“맞네. 빠삐용 기억하면 되겠네!”
난 어린 나이였지만 사물의 특징을 잡아 기억하거나 이미지 연상법을 이용하는 데는 도가 텄었다.
그런데 엄마가 나보다 한 수 위였나보다. 학교에 다녀와 냉장고로 쪼로로 달려가 문을 열어보니 빠삐코가 보였다.
“와! 어려운 이름인데 엄마가 기억했네.”
신기하다며 칭찬하자 엄마가 으쓱하면서 들려준 무용담은 다음과 같았다.
장을 보러 갔는데 내가 사 달라던 아이스크림이 통 기억나지 않더란다. 그래서 엄마는 무작정 냉장고로 갔다. 수많은 아이스크림을 보며 생각날 듯 말 듯 갑갑한 마음으로 한참을 냉장고 옆에 서 있다가 결국 주인아저씨를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다.
“아저씨요. 바퀴벌레 잡아 묵으면서 감옥살이하다가 다 늙어가 뗏목 타고 도망 나온 남자 아이스크림 있는교.”
긴 영화를 한 줄로 요약정리한 엄마도 대단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그 용기가 더 존경스러웠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가게 주인아저씨였다.
“아주머니. 빠삐용 말인가요?”
“맞심더. 빠삐용.”
아저씨는 말없이 냉장고를 열어 엄마에게 빠삐코를 쓱 꺼내 주더란다. 정말 환상적인 어르신들이 아닌가!
난 이 이야기를 90년대 어느 사보에 기고해서 5만 원을 탄 적이 있다. 이름은 몽땅 잊어도 당시 분위기나 중요한 줄거리는 기가 막히게 오래도록 기억하고, 그것으로 돈도 버는 것. 이것도 엄마에게 물려받은 재주라면 재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