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박새길>
딸들아.
내가 떠난 후,
너희가 기억하는 엄마는 어떤 모습일까?
10. 아버지의 난닝구
나는 아버지를 똑 닮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우리 오빠보다 더 아버지를 닮았다. 키는 남편이 아버지보다 훨씬 컸지만 마른 몸매와 체취, 남다르게 따뜻한 손까지 어쩜 그리도 닮았는지.
심지어 아버지로서의 모습도 참 많이 닮았다.
“언제 커서 혼자 깎을래.” 투덜대면서 아이들 손발톱을 깎아주는 모습,
부러지고 망가진 것만 보면 공구함을 꺼내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고쳐내는 모습,
“봐라. 아빠가 싹 고쳤지? 아빠 대단하지?” 칭찬 듣고 싶어 하는 모습까지.
밥 먹을 때 흥얼대지 마라, 음식 남기지 마라, 밤에 휘파람 불지 마라, 잔소리하는 것까지 꼭 아버지를 보는 것만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 먹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닮았다.
남편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몸이 피곤할 텐데도 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묵볶음 하나를 해도 왁을 불에 뜨겁게 데워 볶음요리 한 판을 해냈다.
“볶음은 이렇게 해야 불 향이 제대로 나서 맛있는 거야.” 라면서.
조지아 에덴스에 살면서 남편은 요리사로 소문이 자자했다. 남편이 가장 잘하는 요리는 중국식 만두였는데 한국 지인 대부분이 한 번씩은 그 맛을 봤다.
“유진이, 현주는 좋겠다. 이런 요리를 자주 먹을 수 있어서.”
사람들이 부러운 소릴 칭찬 삼아 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너무 익숙해서 그게 감사한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빠 고마운지 알라고 내가 한소리 했다.
“너희도 나중에 아빠처럼 자상하고 음식 잘하는 남편 만나라.”
그랬더니 유진이가 물었다.
“엄마는 아빠가 요리 잘하는 거 알고 결혼한 거예요?”
“아니, 몰랐는데 횡재했지. 그냥 인간성만 보고 골랐는데 요리도 잘하더라고.”
그러자 현주가 물었다.
“골라요? 결혼할 때는 남자가 쭉 서 있으면 여자가 그중에서 고르는 거예요?”
“고른다는 건 음……. 허허 참 어렵네.”
그러자 유진이가 엄마를 도왔다.
“현주야. 사람은 물건이 아니니까 쭉 세워놓고 고르지 않고 여기저기서 살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좋아서 계속 만나면 그걸 고른다고 하는 거야.”
정말 기막힌 설명이었다.
현주는 한참 생각하더니 “아빠는 엄마가 벌써 골랐으니까 우린 이제 어떡해요?” 했다.
“너희도 크면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내 말에 유진이가 고개를 저었다.
“어린아이도 결혼할 수 있어요. 책에서 봤어요.”
유진이는 증거가 있다며 조르르 달려가 국어 문제집을 들고 왔다. 귀국해서 제 학년으로 입학할 수 있는지 시험을 본다길래 집에서 공부시키던 한국 교과 문제집이었다.
“이거 보세요."
유진이가 작은 손가락으로 가리킨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헨리 8세는 결혼을 하여……’
"제 말 맞죠? 헨리는 여덟 살밖에 안 됐는데 결혼했대요!”
현주가 옆에서 언니를 거들었다.
“맞네! 나보다 어린데 벌써 결혼했네.”
우리 딸들의 남편감은 나중에 고민하고 국어 공부부터 좀 더 시켜야 될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자랑 쟁이다. “아부지가 만든 게 엄마 거보다 더 맛있재?”, “아부지는 뭐든 척척 고쳐내재?” 자랑하길 좋아하신다.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면 금세 아버지 입은 귀에 척 가서 붙었다.
대여섯 살 때였나? 엄마가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는 혼자서 우리 다섯을 돌봐야 했다. 막내인 나는 엄마가 항상 집에서 입고 지내던 주황색 홈웨어를 껴안고 그리움을 달랬다. 평소 “나 시집갈 때 이거랑 아부지 난닝구 꼭 가져갈 거야.” 예약을 걸어둔 옷이었다.
“음. 엄마 냄새난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혜다야. 뭐 먹고 싶은 거 없나?”
아버지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내게 늘 맛난 걸 먹여주고 싶어 했다. 나도 그게 사랑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당신은 정작 기름진 음식을 꺼렸지만, 자식들을 위해 곧잘 튀김을 해주었다. 일식 주방장처럼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예의 그 난닝구를 입고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기름 앞에 선 아버지. 주로 집안에 있는 채소를 쫑쫑 썰어 밀가루에 집어넣고 휘~ 저어서 튀겼다. 채소를 싫어하는 우리를 위한 아이디어였다.
아빠가 해준 요리는 대부분 국적불명이었다. 요리하는 법을 배운 적 없던 아버지는 그냥 당신 생각대로 음식을 했지만 맛은 기가 막혔다.
아버지는 주말이면 우리를 쭉 앉혀놓고 손발톱 검사를 했다. 큰아이들은 스스로 깎았지만, 나랑 셋째 언니는 아버지가 손수 깎아주었다.
아버지는 딸들의 손톱도 남자들처럼 바짝 잘랐는데 가끔 피가 보일 정도였다. 때문에 자라면서 내 손톱이 이리 못생긴 건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라며 원망도 많이 했다.
‘이담에 내 아이들 손톱은 길쭉길쭉 예쁘게 깎아줄 거야.’
결심했다.
아이를 낳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긴 결과, 유감스럽게도 손톱 모양은 유전적 요인이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새우처럼 허리를 구부린 채 손발톱 합해 마흔 개를 깎고 여기저기 튄 잔해를 찾아 쓰레기통에 넣으면 그제야 허리를 펴고 싱긋 웃으며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딸내미들 이래 키웠는데 시집가버리면 뭐하겠노.”
그러면 딸들의 대답은 나이에 따라 달랐다.
막내인 나는 “시집 안 갈 거야. 아부지랑 살 거야.”
셋째 언니는 “시집가서 아부지 모시고 살지. 뭐.”
둘째 언니는 “모시고는 못 살아도 가까이 살면서 맨날 찾아올 건데.”
그러면 첫째 언니가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딸들이 많으니까 돌아가면서 찾아오고 모시고 하면 되지.”
그때 옆에서 야구를 보던 오빠가 결정적으로 한 마디 던졌다.
“니들은 까불지 마. 내가 아들이니까 부모님은 내가 모시는 거야.”
아버지가 우리말을 듣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난 아직도 아버지의 환한 미소가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그 말을 믿었을까? 아니면 지키지 못할 약속임을 알면서도 종달새처럼 떠드는 우리 모습이 그저 좋았을까? 난닝구로 얼굴의 땀을 훔치며 왜 그리 웃었던 걸까?
아버지를 추모공원에 모시고 장례식 마무리를 하러 친정집에 모였다. 아버지의 흔적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준비해두신 여행 장비들, 코펠, 버너, 등산 바지 등이 바닥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아버지가 새롭게 적은 결심들이 익숙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건강하게 즐겁게 살고자 노력한 흔적들이었다.
나는 절규하는 엄마를 멍하니 바라보며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통곡은 엄마의 몫이라 생각한 나는 꿀꺽꿀꺽 울음을 삼키며 견디었다.
그런데 힘겹게 참아낸 눈물은 아버지의 오래된 옷장을 여는 순간 와락 쏟아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옷장은 언제나처럼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꼭 필요한 옷 몇 벌이 전부인 썰렁한 옷장 서랍에 어릴 적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아부지의 반소매 난닝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부지. 아부지! 미안해. 아부지!”
사춘기 이후로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하셨듯 사랑한다는 말 대신 맛난 걸 해드린 적도 없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살을 만진 기억이 언제였던가. 코를 박고 아버지의 체취를 느낀 적은 언제인가. 아버지 유골함의 온기를 느낀 것이 마지막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살아 계실 때 손 한 번이라도 더 잡아 드릴걸. 내 맘에 안 든다고 입 닫고 고개 홱 돌리지나 말걸. 후회는 끝이 없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그저 아버지의 난닝구를 내 눈물로 축축하게 적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