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새길>
딸들아.
우리 가족,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11. 잎과 가지와 뿌리는 하나야.
내가 속한 학교타운에서 한인 아빠는 크게 둘로 나뉜다.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는 아빠와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는 아빠.
전자는 대부분 자영업자로 아침부터 밤까지 주말도 없이 바쁘게 일한다.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편이다.
후자는 학생인 경우로 아이들의 학교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여가시간을 가족과 함께 한다. 가난한 학생 아빠는 자신의 몸과 시간을 아이들에게 내어준다.
이곳에서만큼은 확실히 돈과 시간이 반비례하는 것 같다.
학생인 남편은 가능한 여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려고 했다. 주말엔 경제적 부담이 적은 캠핑이나 낚시를 함께 즐겼고, 저녁이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또래 친구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부모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유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에게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가 가족보다는 친구와의 시간을 더 즐기게 된 것이다. 방문을 잠그고 들어가 친구들과 인터넷 대화를 즐겼고 가족 여행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조금은 섭섭한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가족의 저녁 초대가 있었다. 그 집에는 한국에서 온 열 살 남짓의 어린이 손님이 있었다. 영어 공부를 하면서 일 년간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했다. 그 아이가 좋은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되어 다행이지만 영어 공부를 위해 부모와 떨어져 지낸다는 건 무척 슬픈 일이었다.
“한국 애들은 중학교 들어가면 너무 바빠서 영어공부는 초등학교 때 웬만큼 해놔야 한대요. 우리 때는 중학교 들어가서 알파벳 배웠는데 세상 참 많이 변했죠?”
초대해주신 분의 말씀을 들으니 한숨부터 나왔다. 곧 한국으로 돌아갈 입장이라 아이들 공부 얘기가 나오면 걱정부터 앞서곤 했 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는데 오랜만에 유진이가 안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더니 나와 아빠 사이에 파고들었다.
“아까 걔는 어린데 엄마, 아빠랑 떨어져서 지내야 한대요? 왜 그런 거예요? 부모님이 이혼했어요?”
“아니야. 미국 문화체험도 하고, 조금 놀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거래.”
아이가 영어공부 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산다는 걸 설명하기 어려웠다.
무슨 이유에선지 유진이는 평소와 달리 우리를 꼭 안고 다시 아기가 된 것처럼 굴었다.
“엄마, 아빠 침대는 너무 따뜻해요. 나 오늘만 여기서 자면 안 돼요?”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에게 꽤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남들은 미국 나오려고 그렇게 기를 쓰는데 굳이 왜 한국으로 돌아가려 하냐고. 한국에서 교육 안 해봐서 그렇다고. 한국 들어가면 애들은 어떻게 적응시킬 거냐고.
“영어 한마디 못하는 애들이 남의 나라에서도 적응했는데 자기 나라에 적응 못 하겠어요?”
내 말에도 사람들의 걱정은 계속되었다. 엄연히 다르다고. 한국 공부가 얼마나 어렵고 한국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몰라서 그렇다고.
“미국도 영악한 애 많아요. 나이 먹을수록 뼛속 깊숙이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답하고 또 답하면서 내가 왜 이런 설명까지 해야 하나 한숨이 나올 때도 많았다.
보통 우리처럼 귀국 후 아이가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경우, 아이들 교육 문제로 귀국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구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잘 안되면 어떻게든 비자 문제를 해결하면서 엄마와 아이들은 남고 아빠는 기러기 신세가 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 방법을 권해주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달랐다.
나중에 아이가 커서 혼자 유학 오게 되면 모를까, 교육 때문에 가족이 떨어져 산다는 건 정말 아닌 것 같다.
한국에 가서 아이들이 적응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택한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겁내서 가족이 떨어져 사는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문제는 생길 수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또 성장해가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말씀하셨다. “우짜든지 돈을 모아가 아부지랑 같이 살아야 한다. 느그들 알겠나?” 그때부터 절약은 내게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오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되었다.
‘왕년에……’로 시작하면 집집이 금송아지 없는 집이 없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의 옛날이야기를 들어봐도 금송아지뿐 아니라 외양간도 금으로 짓고 살았던 것 같다.
당시 돈 있던 아버지 친구분들은 유행처럼 서울 근교에 땅을 사모았다. 우리 아버지는 농사지을 것도 아닌데 땅은 왜 사느냐며 교육환경 좋은 곳을 골라 집을 한 채 사고 나머지 돈을 사업에 투자했다.
일남 사녀가 무럭무럭 자라면 자랄수록 아버지의 밑천은 바닥을 보였고 결국 몇 번의 빚보증과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다행히 작은 집은 하나 건져 단칸방에 나앉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친구분이 운영하던 구미공장으로 혼자 내려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자식들이 불안해서 공부에 방해될까 봐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얼굴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과 집이 작아졌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곧 새 학년을 맞이하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학용품은 새 걸로 사주꾸마. 가방은 일 학년 때 쓰던 거 그냥 써라.”
지난 일 년간 쓰던 사구려 책가방은 군데군데 올이 풀리고, 쇠붙이 부분은 녹슬었고, 바닥에는 구멍까지 나 있었다.
“저렇게 헐었는데?”
“그래도 쓰던 거 마저 써라.”
엄마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구멍이 나서……”
“구멍으로 책이 빠져나오면 새거 사주꾸마. 그때까지 무조건 써라.”
“……”
엄마의 말투로 봐서 두 번 말할 것도 없었다. 하는 수없이 나는 헌 가방을 들고 새 학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던 우리 학교에는 나와 같이 2년 연속 같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아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안 그래도 소심했던 난 가방 때문에 점점 더 위축이 되었다. 선생님이 뭐 하나를 지적해도 괜히 가방 때문에 무시당한 것 같고, 지나가던 친구가 나를 흘낏 쳐다봐도 ‘쟨 왜 저런 더러운 가방을 메고 다니지?’ 흉보는 것 같았다.
아침마다 학교 가는 게 그렇게 싫었다. 결국 나는 꾀병을 부리며 등교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등교거부가 이틀 계속되자 엄마는 둘째 언니를 내게 보냈다. 특사 파견이었다.
“너 무슨 일 있지? 언니한테 말해 봐.”
나는 속으로 잠깐 고민했다.
‘언니한테 가방 때문에 그런다고 말할까? 그러면 엄마가 새 가방을 사줄까?'
“선생님이 괴롭혀? 아니면 친구가 못살게 해?”
친절한 둘째 언니가 자꾸만 파고들었다.
“가……방……”
“뭐? 크게 말해 봐.”
“가방 때문에 그렇다고.”
“가방이 왜?”
“나만 가방이 낡았어. 다른 애들은 새건대.”
“아하! 알았다. 새 가방 못 사서 그렇구나.”
“아니야. 새 거 못 사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낡아서 그렇다고.”
“그게 그거지 뭐야. 결국, 가방 사줄 때까지 학교 안 간다는 소리잖아. 너 요즘 엄마, 아빠 힘드신데 그렇게 철없이 굴면 돼?"
아니, 이게 뭐지? 항상 내 편이고 친절하던 둘째 언니가 나를 나쁜 아이로 몰다니! 정말 섭섭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언니 나가!”
나는 언니도 보기 싫었다. 엄마도 보기 싫고, 낡은 가방만큼 낡은 우리 집도 뭐도 다 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슬프게 울어댔다. 셋째 언니가 옆에서 ‘울어라 태풍아~ 밤이 새도록~~’ 노래 부르며 놀려대니 더욱 더 서러워서 울어재꼈다.
어릴 때는 왜 그랬을까? 울기만 하면 그렇게 잠이 쏟아졌다. 졸리니 나만의 아지트 안방 장롱 속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뉘엿뉘엿 엿가락이 되어 넘어가는 해를 보며 장롱으로 기어들어갔다.
안방 자개장은 당시 나만의 비밀 장소였다. 수북이 쌓인 폭신한 이불 위에 몸을 뉘면 얼마나 포근하던지. 안에 들어가 최대한 문을 닫고 손가락 하나만 한 틈이 남았을 때 그 사이로 얇은 이불 끝을 넣고 살짝 당기면 안에서 장롱 문을 닫을 수 있었다. 그러면 아무도 내가 그 안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정말이지 난 그 안에서 잠깐만 자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너무 많이 자면 저녁때를 놓치고 엄마에게 혼이 날 테니까. 하지만……
“별아네도 업꼬 놀이터에도 업꼬 아가 도대체 어데갔노?”
걱정 반, 분노 반의 엄마 목소리에 이어 아버지가 소리쳤다.
“집에 사람이 몇인데 아가 나가는지도 모리나?”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화가 잔뜩 묻어있었다. 곧 언니의 변명이 이어졌다.
“분명히 방에 있었어. 나가는 소리 못 들었단 말이야.”
“그걸 말이라꼬 하나, 지금? 방에서 그래 음악 소리를 크게 틀어놨는데 아 나가는 소리가 들리겠나?”
이번에는 오빠 목소리가 들렸다.
“옥상에도 없는데요? 학교 운동장에 가볼까요?”
“아이다. 거가 어딘데 학교까정 갔겠나?”
나는 장롱 안에서 흥미진진하게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내가 없어지면 가족들이 이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찾아다니는구나 싶어서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혼이 나도 엄청 혼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가시나, 들어오기만 해 봐라. 우예 쪼매난 가시나가 이래 속을 썩이노?”
엄마가 욕을 하자 아버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옜는데 아가 집을 나가노?”
“뭘 우예 해예? 당신은 한 번씩 와가 뭔 말을 그래 합니꺼?”
“뭐? 한 번씩 와가? 내가 한 번씩 오고 싶어 이래 오나? 그럼 니가 나가 살아 봐라.”
격한 말이 몇 번 오가더니 화가 난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쾅하고 대문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어떻게 하지? 지금 나가야 하나? 엄마한테 엄청나게 혼날 텐데.’
망설이는 중에 갑자기 장롱 문이 활짝 열렸다. 아마도 화가 난 엄마가 요를 깔고 누우려고 장롱을 열었던 것 같다. 장롱 안의 이불과 함께 내 몸도 방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뭐꼬?”
엄마는 소처럼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 식잖은 가시나야! 니 뿌라삔다.”
최고로 험한 욕을 들은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오빠와 언니들을 향해 구원 요청을 한 것이다. 하지만 나의 애절한 구원 요청도 엄마의 분노에 막혀 그들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결국 혼이 날 만큼 혼이 난 후, 둘째 언니 손에 이끌려 화장실로 갔다. 땟국물 줄줄 흐르는 내 얼굴을 닦아주며 언니가 말했다.
“으이그. 바보야. 아무리 어려도 생각이 있어야지. 아버지가 왜 주말에만 잠깐 다녀가시는지 몰라?”
“흐흑……헙”
울어서 코는 막히지, 세수시킨다고 입은 자꾸 닦아대지, 숨을 못 쉬어 헐떡이던 나는 생각도 하기 싫고 대답도 하기 싫었다.
“엄마, 아버지는 우리 걱정한다고 쉬쉬하셔도 너 말고 우리 넷은 다 알아. 우리 집 망했어. 그래서 아버지가 우리 먹여 살린다고 멀리 친구분 공장에서 일하는 거야.”
순간 머리가 아팠다. 망치로 맞은 것 같다는 드라마 속 대사가 이거구나 싶었다.
드라마는 정말 현실이었다. 사업이 망해서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는 것과 그 집의 철없는 막내딸이 부모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까지 똑 닮아 있었다. 순간 난 부모님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걸 알았다.
세수를 다 하고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엄마 혼자였다.
“엄마.”
“……”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엄마 속 썩이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졸려서 장롱에서 잠이 든 거야. 진짜 엄마 속 썩이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알았다. 그만 밥묵으라.”
“아부지는?”
“니 찾았다 소리 듣고 고마 구미 내려간다 카드라.”
나는 엄마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눈물이 자꾸 나왔다. 우리 집이 쫄딱 망한 게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면서도 엄마가 불쌍했고 아버지가 안 돼서 눈물이 나왔다.
“나 새 가방 필요 없어. 진짜 그거 때문에 장롱에서 잔 거 아니야.”
“알았다. 고마 해라. 니가 어려도 이건 알아들을 끼다. 우리 이자 마이 아끼야 된다. 우짜든지 돈을 모아가 아부지랑 같이 살아야 된다. 알았재?”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을 담아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년 여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아버지는 다시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우리는 큰 것은 안 쓰고 작은 것은 아꼈다. 우리에게 가족이 다 함께 산다는 것은 좋은 것을 입고, 맛난 것을 먹고, 멋진 곳을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였다. 우린 정말 그랬다.
4년간 키우던 아이비가 있었다. 조지아로 이사 오면서부터 남편이 정성껏 돌보던 식물이었다.
마디에서 뿌리가 자라나길 기다렸다가 적당히 잘라서 다른 화분에 심어주면 새로운 아이비 화분이 몇 개씩 생겨나곤 했다.
한번은 쭉 뻗은 넝쿨만 보고 남편이 뿌리가 제대로 뻗지 않은 것을 서둘러 가지치기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새로 심은 아이비는 시들어 죽고 말았다.
때가 되면 자연스레 자식은 부모를 떠나는 법이다. 하지만 뿌리도 채 내리지 않은 것을 강제로 떠나보내면 어린 아이비처럼 말라버리게 될 것이다.
가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식물이 아닐까? 아빠는 뿌리가 되어 땅의 물과 양분을 쭉쭉 빨아들인다. 엄마는 커다란 잎이 되어 해의 기운을 받아 아이들에게 전할 것이다.
먼 곳에 좋은 흙이 있다고 뿌리 혼자 양분을 흡수하러 길을 떠나지는 않는다. 해가 가렸다고 잎이 혼자 떨어져 나가지도 않는다.
우리도 나무처럼 아이들을 키울 것이다. 아이들이 튼튼한 뿌리를 땅에 내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