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새길>
딸들아.
엄마는 왜 늘 너희에게 미안할까?
책에 나오는 멋진 부모가 되고 싶었는데
너무 거리가 먼 엄마라서 그런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죄인이라더니
아무래도 그 말이 맞나 봐.
8. 사랑해서 죄인이 된 느낌
미국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이사했다.
마땅히 읽을 책이 없어서 나는 영어 동화책을 우리말로 번역해 아이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어린이 용 책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영어단어가 꽤 되었다. 특히 형용사나 의성어, 의태어가 그랬다.
눈치껏 의미만 통하게 대충 지어 말하는 나를 보고 아이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와! 엄마는 영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
“엄마는 모르는 게 뭐예요?”
얼마 안 가 아이들의 영어실력은 일취월장했고, 엄마의 영어가 그저 그렇다는 걸 금세 눈치채버렸다. 영원한 영웅으로 남길 원한 건 아니지만 무지한 엄마가 된 느낌은 정말 별로였다.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가 영어를 못한다며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냥 당연한 거라고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딱 한 번 유진이가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일이 있었다.
중학교 입학식이 있던 날. 입구에서 한 아름의 안내서를 안겨 주더니 교실로 가서 담임선생님과 간단한 상담을 하라고 했다.
짧은 영어로 나름 열심히 상담을 마치고 나오니 산 넘어 산. 이번에는 강당으로 가서 학교 시스템에 대한 각종 설명을 듣고 이런저런 신청을 하라고 했다.
유진이는 새로운 학교에 오니 흥분한 모양이었다.
“엄마. 특별반 신청할래요.”
“엄마 토마스가 인사하는데 봤어요?”
“엄마. 나 카 라이드 싫어요. 스쿨버스 꼭 타고 다닐 거예요.”
“엄마. 특별반 여기서 신청하라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엄마 돈 주면 제가 학교 티 사 올게요.”
엄마
엄마
영어가 필요한 일은 대부분 남편이 맡아 해준 덕에 몇 년이 지나도 기본적인 영어밖에 못하던 나였다.
“여보. 특별반을 왜 신청하래요? 초등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셨는데?”
“여보. 스쿨버스 줄이 세 개예요. 어느 줄이래요?”
“여보. 티를 지금 사야 한다는 거예요? 나중에 신청서 나오면 사라는 거예요?”
“여보. 운동 서클 여러 개 신청해도 된대요?”
아이에게 득이 되는 건 하나라도 더 챙기고 싶은 욕심에 나는 남편만 불러댔다.
현주까지 챙기며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남편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른 순간이 왔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네. 나라고 어떻게 다 알겠어요?”
그 말을 듣고 내 얼굴은 벌게졌다. 무안한 맘에 다 그만 두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이가 맘에 걸려 그럴 수도 없었다. 난 이를 악물고 여기저기 다니며 가입하고, 구매하고, 상담을 계속했다.
지칠만큼 지쳤을 때, 유진이의 초등학교 친구 아나와 그 엄마를 마주쳤다. 아나 엄마가 내게 다가와 뭐라고 인사를 건넸는데 난 그걸 몇 번 반복해 말할 때까지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아나가 천천히 다시 말해주자 그것이 아주 간단한 안부 인사였다는 걸 알고 조금 당황했다.
드디어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학교를 나왔다. 아이의 새로운 학교생활을 온 가족이 최선을 다해 도왔다는 생각에 나름 뿌듯한 맘이 들었다. 그런데 정작 유진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새 학교 좋아?”
“……”
“담임 선생님 참 좋으시더라. 성함이 뭐였더라?”
“……”
사춘기를 맞아 귀찮으면 한 번씩 대답을 안 하는 유진이었다. 뭐가 불만인지 내 말을 무시하는 모습에 난 또 기분이 상했다.
“너 왜 그래?”
그러자 유진이가 톡 쏘는 말투로 물었다.
“엄마. 아까 정말 아나 엄마가 뭐라 그러는지 못 알아 들었어요? 그렇게 간단한 인사였는데?”
그동안 영어 못하는 엄마를 핀잔 준 적 한 번 없던 아인데 나름 창피했었나 보다. 난 당황해서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 너무 시끄러운데 아줌마 발음도 그렇고.”
“아줌마 발음은 별로 이상하지 않았는데요?”
그 말에 가슴 저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던 자격지심이 고개를 쳐들고 말았다.
나는 차에 올라탈 때까지 꾹 참았다. 그러나 인내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스멀스멀 분노가 차오르면서 이해심과 참을성의 고삐가 완전히 풀리고 만 것이다.
“너희는 매일 학교 가서 영어로 공부하고 말하잖아. 거의 온종일 한국말만 하는 엄마는 당연히 영어가 서툴지. 게다가 아나 엄마는 콜럼비아 사람이잖아. 유진이 너야 영어를 잘하니까 엑센트가 다른 영어도 쉽게 이해되겠지만 난 그런 건 더 안 들려. 엄마가 못 알아들으면 네가 통역 좀 해주지 왜 가만있었어? 여기 사는 남미 애들 못 봤어? 영어 한마디 못하는 부모 모시고 다니면서 통역 다 해주고 동생까지 챙기잖아. 넌 영어 배워서 뭐 할 건데? 영어 못한다고 엄마 무시하려고 배운 거야?”
못 알아들었느냐고 딱 한마디 하고 인상 좀 찌푸린 아이에게 인격 모독에 가까운 말을 하면서 화를 냈다.
‘버벅거리는 영어로 저 좋아하라고 돌아다니며 해줄 것은 다 해줬는데, 어쩜.’
이것은 엄마로서의 섭섭함이었다.
용처럼 불을 뿜고 말처럼 길길이 뛰고 나니 기운이 쏙 빠지고 눈물만 났다. 아이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거다. 그만한 일로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 지르는 엄마라니.
집으로 돌아와 유진이는 미안하다고 내게 사과했고 나도 아이에게 사과했다. 내 화가 지나쳤고 무엇보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그렇게 화를 낸 이유가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하는 내 성향과 그에 못 미치는 능력과, 좌절하면 솟아오르는 분노를 주체 못 한 내 잘못이었다.
부모가 죄인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부모가 되면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거라 하셨다.
셋째 언니는 공부를 특출 나게 잘했다. 그런데 언니의 문제는 잠이 너무 많다는 거다. 잠만 많은 게 아니라 한 번 잠이 들면 옆에서 북 치고 장구를 쳐도 깰 줄 몰랐다.
셋째 언니가 혼자 집에 있다가 잠든 날이면 나머지 가족들은 또 하나의 열쇠를 가진 누군가가 올 때까지 이웃집, 독서실 등으로 흩어져 문이 열리길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한 사람은 집 앞에 남아서 대문을 두드리고 전화와 인터폰을 걸고 소리를 질렀다. 정말 동네에 소문이 다 났을 정도였다.
시험이 닥치면 셋째 언니는 늘 잠과의 사투를 벌였다. 책상에서 졸고 화장실에 앉아서도 졸았다. 저녁 먹고 나면 으레 “한 시간만 잘게. 누가 나 좀 깨워줘.” 부탁했다. 우리 자매들은 일제히 “난 몰라. 절대 나 믿지 마.” 대답했다. 어차피 깨워봐야 일어나지도 않을 테니 그 뒷감당을 하기 두려워서였다. 결국, 맘 약한 아버지가 그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날도 전날 밤샘한 언니가 식탁에서 머리를 박고 조는 모습에 짠해진 아버지가
“혜령아. 고마 푹 자라. 내가 깨바주께.” 하셨다.
“그럼 11시에 꼭 깨워주세요. 이불 펴고 자면 못 일어나니까 책상에서 자고 있을게요.”
“알았으니까 맘 푹 놓고 자라.”
언니는 아버지를 믿고 중앙 등에 스탠드 등까지 밝혀둔 채 잠이 들었다.
드디어 11시가 되었고 아버지가 언니를 깨우러 출동했다. 잠결인 나도 들었을 만큼 아버지는 언니를 큰 소리로 흔들어 깨웠다.
“일나라. 11시 넘었다. 내일 시험공부해야 된다 안 캤나?”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5분만……”
아버지는 5분 후에 다시 언니를 깨웠다. 하지만 언니의 입에서는 다시 5분 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하길 여러 번. 결국, 아버지는 잠에 취해 못 일어나는 불쌍한 딸에게 담요까지 덮어주며 포기를 선언했다. 푹 자라고 불 끄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다음 날 아침. 온 집안에 언니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나 몰라. 왜 안 깨웠어. 오늘 시험공부 하나도 못 했단 말이야. 내가 아버지를 믿는 게 아니었어. 나 어떡해. 엉엉.”
가방에 책을 쓸어 넣으면서 언니는 아버지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언니의 뒤에 서서 몸 둘 바를 모르며 “깨밨는데 몬 일어 나가 …… 어쨌든 미안타.” 하는 아버지를 보며 엄마가 대신 화를 냈다.
“가시네야. 니 아부지가 얼마나 깨분 줄 아나? 그래 몬 일나겠으면 매번 뭐할라꼬 깨바달라 카노? 어이?”
“몰라. 난 못 들었단 말이야. 그리고 담요는 왜 덮어줘? 불은 왜 끄냐고! 춥거나 눈부셔서라도 일어나게 냅두지!”
엄마는 참다못해 언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엄마에게 소리쳤다.
“시험 보는 아 머리는 와 박노! 안 그래도 내 때메 공부도 몬한 아를.”
아버지는 징징거리며 학교 가는 언니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울지 말고 어서 가서 평소 실력으로 시험 잘 봐라. 아부지가 잘몬했다.”
언니들이 이런저런 일로 부모님 속을 썩이는 걸 보면서 난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살면서 부모님을 자주 원망하게 되었다. 잘 되면 내 덕, 못되면 부모 탓. 딱 그 짝이었다. 요즘 내 아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는 걸 보면 지금 그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요즘 가끔 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부모가 죄인이다. 느그들도 자식 낳고 부모가 되면 다 느낄기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더 미안한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