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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Dec 29. 2020

아버지 애인을 만나다

아버지와 반대로 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고 6인실 병실에 한 여성분이 들어오셨다. 단발머리에 나이는 50대 중반의 그냥 평범한 아줌마였다. 두리번거리는 그분을 보고 나는 다른 환자분 면회를 오신 분인 줄 알았다. 그냥 무시하고 화장실로 나갔다. 병실로 돌아오자 그 아줌마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아버지의 애인이었다. 오래전 내가 봤던 그 뒷모습의 그 여성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슬퍼 보였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분을 친구라고 소개했다. 아줌마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저 “안녕하세요”를 반복할 뿐이었다. 마음속에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나가라고 해야 하는 건지 어떤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자리를 피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의 관계가 어떤 관계이고 어떤 사이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팩트였다. 그리고 많은 배신감이 들지는 않았다.


  만약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금술이 너무 좋은 커플이었다면 나는 화가 나고 끝도 없는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모님의 그냥 사는 그런 사이처럼 보였다.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든 세월에 흐름에 지쳐서 사랑의 감정이 우정보다도 못한 감정으로 변질되었든 중요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능력 없고 다정하지도 않은 아버지와 사는 어머니가 불쌍해 보였다. 아마도 자식 때문에 산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한참을 병실 밖에서 서성였다. 혹시나 어머니가 면회를 오면 충격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심한 척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기 건너로 들려오는 낮지도 높지도 않은 톤의 목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아들, 무슨 일 있어?” 나는 그냥 전화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어디냐고 물어봤다. 방금 일 끝나고 집에 왔다면서 아버지의 안부를 물어봤다. 자신을 돌볼 시간도 없이 두 아들과 아버지의 뒤에서 묵묵하게 세월을 견디고 있는 안쓰러운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병원으로 오지 않을 것을 확인하고 나는 안심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한참이 지나고 병실로 다시 돌아갔다. 창가 구석에 있는 침대로 걸어가는 길에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해”였다. 사랑한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고맙다고 하였다. 나는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육체적인 사랑 때문에 외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녔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거 같았다. 죽음 앞에서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이 뻔뻔해진 모습에 당장이라도 연을 끊고 싶었다. 사람이란 이렇게 이기적인 동물이구나 항상 주변보다는 자기를 중심으로 자신을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뻔뻔하고 이기적인 존재가 맞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병실 앞 벤치에 앉아 있는데 그 보기 싫은 아줌마가 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둘의 관계를 아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런 내 앞에 하얀색 봉투를 내밀었다. 당장 돈을 꺼내서 얼굴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고함을 치면서 한 번만 더 나타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 봉투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줌마는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맛있는 거 사드리라고 말을 하며 손에 봉투를 쥐어주려고 했다. 나는 봉투를 거절하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했다.      

“그냥 가세요, 그리고 장례식장에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뒤를 돌아 복도로 걸어갔다. 뒷모습은 슬퍼 보였다. 아마 그녀도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내 머릿속에서 당장 지우개로 지우고 싶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게 되었다.  

   

  나 또한 결혼을 하면서 지금은 하루하루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은 그런 느낌과 감정이 공존한다. 물론 바람을 피우고 배신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혼이라는 것이 항상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은 알 것 같다. 그리고 가족이기에 그 무겁고 힘든 나의 이야기를 하기 힘든 것도 이해가 간다.


사는 것이 만만하지 않다. 밖은 전쟁터이고 가끔은 총도 없이 전쟁의 한 복판에 던져지기도 한다. 죽기 살기로 도망치고 포복하고 비겁하게 숨어서 겨우 목숨을 부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그 힘든 전쟁터의 이야기는 가슴속에 묻어두게 된다. 나만 힘들면 된다. 어떻게든 살아가면 된다. 결혼 6년 차인 신참인 나도 이런 생각을 종종 하며 현관문을 열고 그 어둠을 숨기고 미친 광대가 되어 딸에게 다가간다.


  만약에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를 위로해주는 다른 사람이 밖에 있다면 나도 의지하고 품에 안겨 힘들다고 무섭다고 울고 싶지 않을까?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다. 별로 슬프지도 않은 영화나 드라마에 장면에도 눈물을 흘리던 나였는데 천하무적처럼 강해졌다. 이제 눈물이 나지 않는다. 어깨의 무게감과 삶의 무서운 혼자일 때와 비교할 수 없는데 이제는 친한 친구들에게도 힘들다고 말을 꺼내기 힘들어진다. 아마도 나의 못난 아버지도 힘들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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