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버텨내고 집에 돌아오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 있다.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머릿속은 하루 동안 겪은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회의 중 스쳐 지나간 말투, 상대의 미묘한 표정 변화, 굳이 말로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느껴졌던 분위기까지. 누군가는 이미 잊어버렸을 장면들이 내 안에서는 오래 남아 다시 떠오른다. 그렇게 하루를 복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에 닿는다.
“이렇게까지 느끼는 게 정상일까?” 혹은, “혹시 내가 불안장애는 아닐까?”
이 질문은 HSP, 흔히 말하는 ‘민감한 사람들’이 가장 자주 마주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민함과 불안장애가 꽤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긴장하고, 쉽게 피로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흔들린다. 하지만 이 둘은 닮아 보일 뿐, 그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꽤 다르다. 이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질을 병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오해는 생각보다 오래, 깊게 남는다.
HSP라는 개념을 처음 학문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심리학자 Elaine Aron이다. 그는 HSP를 불안하거나 약한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을 받아들이는 신경계의 처리 방식이 더 깊고 섬세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자극을 받아도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더 오래 머금고, 더 넓게 연결 짓는 사람들. 문제는 이 깊이가 늘 편안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깊게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오래 남는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도 멀쩡한 사람이 있는 반면, 별다른 갈등이나 사건이 없어도 집에 돌아오면 말 한마디 하기 벅찬 사람이 있다. 이 차이는 흔히 ‘멘탈의 강약’으로 설명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용량과 방식의 차이에 더 가깝다. HSP는 하루 동안 쌓인 감각과 감정이 몸 안에서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피로가 불안처럼 느껴지고, 긴장이 성격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얼마 전 아주 친한 지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너, 요즘 많이 불안해 보여.”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나 요즘 너무 좋은데. 너무 좋아서 그렇게 보였나 보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21년 동안 조직에서 생활하고 퇴직한 이후, 나는 새로운 삶을 준비해 왔다.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불안이 없지 않았다. 나는 원래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충분히 검증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다. 계획이 실제로 작동하는지, 변수는 없는지, 혹시 놓친 건 없는지 계속 점검한다. 그런데 그렇게 준비한 시간들이 쌓여 어느새 1년을 무사히 살아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스트레스는 적었고, 금전적인 부분도 걱정했던 것에 비해 큰 어려움 없이 흘러갔다. 어머니의 병환이나 크고 작은 일들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내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스스로를 소모하지 않으려는 태도 역시 조금은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내가 불안해 보인다고 말한다. 아마도 내가 가진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이 아주 틀렸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거슬렸다. 오히려 그 말을 한 사람의 삶이 더 불안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밤에 잠도 못 잘 텐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의 상태를 해석한다는 것을.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는다. 불안장애 역시 긴장, 초조, 과민 반응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장애에서의 불안은 방향이 다르다.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종종 “아무 일도 없는데 불안하다”고 말한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고, 특별한 자극이 없는데도 마음과 몸이 먼저 반응한다. 심장이 빨라지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불안은 하나의 감정이라기보다 늘 켜져 있는 경보음처럼 느껴진다.
반면 HSP가 느끼는 불안은 훨씬 구체적이다. 사람 많은 공간, 시끄러운 환경, 감정 소모가 큰 관계 속에서 더 심해진다. 그리고 그 자극에서 벗어나면 서서히 가라앉는다. 혼자만의 시간, 조용한 공간, 자신을 과하게 자극하지 않는 환경이 주어지면 회복이 가능하다. 이 ‘회복 가능성’은 매우 중요한 단서다. 불안장애는 환경이 바뀌어도 불안이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HSP의 불안은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경과학 연구에서도 이 차이는 어느 정도 설명된다. HSP는 위험을 과대평가해서 불안해지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감각과 정서를 처리하는 뇌 영역이 더 활발히 작동한다. 다시 말해, 위험하지 않은 것까지 위험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구조에 가깝다. 그래서 이들은 “무섭다”기보다 “버겁다”는 표현을 더 자주 쓴다. 불안장애의 언어가 “큰일 날 것 같다”라면, HSP의 언어는 “너무 많다”, “과부하다”에 가깝다.
문제는 이 두 상태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민한 사람들은 종종 “너무 예민하다”, “생각이 많다”, “마음이 약하다”는 말을 듣는다. 대부분 악의 없는 말이지만, 그 말들은 조용히 자기 의심을 키운다. ‘다들 잘 버티는데 왜 나만 힘들지?’라는 질문은 결국 ‘내가 이상한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다. HSP는 잘못된 상태가 아니다. 다만 이 기질은 오랜 시간 무시당하고, 과부하가 누적될 경우 실제 불안장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때의 불안장애는 예민함 때문이 아니라, 예민함이 존중받지 못한 결과다. 문제의 원인은 성격이 아니라 환경이다.
그래서 HSP와 불안장애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불안이 삶을 완전히 막고 있는가, 아니면 삶을 너무 많이 받아들이고 있는가. 전자는 치료가 필요한 상태일 수 있고, 후자는 이해와 조정이 필요한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을 병으로 착각하고,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게 된다.
예민함은 약점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섬세하게 감지하는 능력이다. 다만 이 능력은 거친 환경 속에서 쉽게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HSP에게 필요한 것은 “덜 느껴라”는 조언이 아니라, “어디까지 느껴도 괜찮은가”를 스스로 정하는 기준이다. 불안을 없애려 하기보다, 과부하를 줄이는 방향이 먼저다.
결국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는 불안한 사람인가, 예민한 사람인가. 어쩌면 이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으로.
그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불안과 예민함은 지금보다 조금 덜 뒤섞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불안을 ‘부족함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모자라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그래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경험해 보니, 채우기 위한 노력은 분명 도움이 되었다. 어느 정도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지점, 그리고 남들도 인정하는 수준에 도달하자 비로소 나 자신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남의 시선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졌다는 것. 아니, 시선을 완전히 벗어나는 대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 과정은 내게 하나의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불안이라는 감정을 아주 나쁘게만 보지 않는다. 때로는 그것이 나를 점검하게 만드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고 느낀다. 아무런 의심 없이 자기 만족 속에서 절벽 앞에 서 있으면서도 태평하게 하루를 보내는 사람보다, 어쩌면 더 건강한 삶의 태도일 수도 있다.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태어남이 이렇게 태어난 것이라면, 완전히 바꾸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제 불안함도, 예민함도 그리 밉지 않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방식이자, 앞으로 살아갈 나만의 리듬이기 때문이다.